1. 생애와 활동
1) 출생과 배경
상화[무량(無量) 상화(想華) 백아(白啞)] 이상화 無量 : 18~21세 때의 호. 불교적임, 想華 : 22~24세때의 호. 탐미적임, 尙火 : 25세 이후의 호. 혁명적임,
白啞 : 38세 이후의 호. 비통한 심경을 상징함. 자조적임, 정병규, 「문학사상」(1973. 7), p.384 참조.
는 1901년 4월 5일 경북 대구시 중구 서문로 2가 12번지에서 태어났다. 부친 이시우와 모친 김진자 사이의 4형제 중 둘째로, 본관은 월성 이씨다. 그는 일곱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백부 이일우가 세운 학교에서 한문 교육을 받았는데, 백부의 훈도와 유년기 체험은 훗날 이상화의 인격형성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당시 이상화의 가문은 삼 천석 부자로 알려질 만큼 대구에서 명망이 높은 집안으로, 백부 이일우는 우현서루(友弦書樓)를 세워 많은 인재를 길러냈으며, 교육 이외에도 가산(家産)을 독립자금에 쏟아 부을 만큼 지사(志士)적 면모를 갖춘 사람이었다. 그런가 하면 이상화의 형 이상정은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는 등 이상화의 가문 사람들은 그야말로 우리나라가 겪은 난세를 의롭게 살아간 대구 명문가의 후예들이었다.
이러한 그의 집안내력은 그의 시작 전반에 정신적 기조를 형성하는 민족주의 사상과 저항의식의 토대가 된다
2) 주요활동
지사적 가풍속에서 자란 이상화는 1919년 3.1운동 당시 허범, 백기만 등과 대구 거사 모의에 참여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 되어 서울의 박태원 하숙으로 피신하여 화를 모면했다. 서울로 간 이후 상화는 박태원에게 인생과 예술에 관한 영향을 적지 않게 받게 된다.
1921년에 동향 친구인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朴鍾和)를 만나게 되고 그들과 의기 투합하여 ≪백조≫동인에 가담한다. 이 ≪백조≫ 동인 가담과 「말세의 희탄」 「單調」발표(1922)로 인해 비로소 시인 이상화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1922년에 프랑스 유학을 뜻에 두고 일본에 갔고, 1923년 9월 ≪백조≫3호에 「나의 침실로」를 발표했다.
1923년 9월 참혹한 관동대진재를 겪으면서 새삼 망국민의 비애와 절망을 절감하고 1924년 이상화는 프랑스 유학의 꿈을 버리고 동경으로부터 귀국한다.
1925년에 경향파 집단(PASKYULA)에 가입했고, 그 해 8월에는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KAPF)의 창립멤버로 활동했다. 이듬해인 1926년 ≪개벽≫6월호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했다. 이 시로 그는 식민지 시대의 대표적 저항시인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이후 의열단 ‘이종암사건’(1927).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1927), 신간회의 ‘ㄱ당사건’으로 구금되기도 하였다. 또한 1937년 독립운동가인 형 이상정을 만난 혐의로 몇 차례 일본군에 구금되어 고초를 치른다. 1939년 교남학교 교사로 재직 시, 이상화가 작사한 교남학교 교가 가사가 문제되어 가택 수사를 당하고, 자신의 시 원고까지 압수당한다.
정한모(1981), 『이상화 연구』, 새문사.
양승국 외(1996), 『한국현대시 400선』, 태학사
김봉군 외(2001), 『한국현대작가론』, 민지사
정우택(2004), 『한국 근대 자유시의 이념과 형성』, 소명출판
오선영(2003), 『꼭 읽어야 할 한국 현대시222선』, 타임기획
※참고사이트
이상화 기념 사업회 ; http://www.sanghw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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