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미학 삶 속에서
삶 속에서
나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에 아주 관대한 사람이다. 관심이 있거나 호감이 있는 것에서 아름다운 요소를 찾아내는 것에 꽤 능숙하다고 생각하며 산다. 물론 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전적으로 주관적인 영역에 속하는 탓에 단언하는 것이지, [아름다움의 조건: 그것이 얼마나 완벽하게 황금비율에 맞아 떨어지는가, 그것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감동을 주는가,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비슷한 수준의 긍정적 평가를 이끌어낼 수 있는가] 따위의 평가 목록이 정해져 있었더라면 나는 내 이야기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감히 단언할 꿈조차 꾸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세상에는 그런 것들로 가치환산되며 평가되는 아름다움도 있다.) 때문에 내 삶은 그런대로 아주 소소하게 아름다운 것들로 둘러싸여 있다. 아까 하교할 때 보았던 하늘의 깨끗한 색깔. 버스를 타고 오며가며 보는 가로수의 생김새(눈여겨보는 은행나무는 세 그루인데 지금은 낙엽이 다 떨어졌다. 초록 잎이 나있을 때의 모양도 제각각이다. 두 그루는 세로로 길쭉한 타원 꼴이고, 다른 한 그루는 위가 평평한 이등변 삼각형 모양이다. 가지밖에 남지 않았어도 잎이 붙어있던 때와 비슷한 모양인 것이 보인다. 아주 멋있다.). 수업을 마치고 인문관을 나오며 보았던 구름. 아침에 유난히 크게 보이던 낮달. 새빨간 동이 트는 새벽. 카메라를 가지러 내려갔다 올라오는 그 사이에 사라져버린 화염 같던 노을. 자고 일어나니 창문 밖이 눈부셔 문을 열자 새하얗게 쌓여있던 부산의 눈. 이기대의 바다. 초등학교 때 야영을 하며 보았던, 생에 보았던 중 가장 별로 빽빽하던 하늘. 물론 아름다움은 자연에만 있지 않다. 어제 본 글의 문장. 멋진 노래의 멜로디. 좋아하는 배우의 얼굴.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인조 건축물의 장엄함. 소년만화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열정. 좋아하는 테니스 선수의 경기 스타일. 클림트의 그림(키스 퍼즐이 집에 있다). 노이슈반슈타인 성. 꽃시장에 가서 보았던 형형색색의 꽃. 수집하는 잉크의 색깔. 먹기도 아까울 정도로 예쁘게 차린 디저트의 만듦새와 맛. 마침맞게 내리쬐는 햇빛에 반짝이며 흔들리는 대로 지던 나뭇잎의 그림자(‘코모레비’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나는 이런 것들을 수십 수백 개도 더 찾을 수 있다. 좋아하는 것들을 미시적으로 분석해 그 속의 아름다움을 가려내는 것은 내 소소한 취미이기도 하다.
아름다움을 열거하는 것만큼 쉬운 일이 어디 있을까. 자연과 어떤 대상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아름다움 말고도 사람 속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이 경우는 개인적 차원보다 더 공감을 사기 쉽다. 어떤 사람이 목적을 위해 매진한 치열한 삶의 흔적과 그 결과.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희생.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에게로 쏟아지는 불특정 다수의 온정. 관계 속에서의 사람과 우정. 우리는 사람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에 흔하게 공감한다. 그러나 보편적인 만큼 이들은 추상적인 것이 되기 쉽다. 내게도 그런 인간미는 숭고하고 가슴 따뜻한 것일지언정 가장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 아름다움은 지극히 주관적인 영역이다. 같은 것을 아름답다 여긴다 하더라도 똑같은 정도와 내용으로 느낄 수는 없다.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나의 생각과 가치관을 통틀어 얘기하는 것, 즉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제 내가 가장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아름다움이 주관적인 탓에 내가 가장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을 똑같이 경험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경험한이라고 쓴 이유는, 내가 정의하는 가장 아름다운 것이 어떤 대상에 특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과 내 인식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어떤 순간이다. 그리고 고백하건대 단 하나만을 집어 이것이 내가 가장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이라고 외칠 수도 없다.
세 가지 이야기
(1) 올해 늦은 봄이었다. 나는 학교를 가기 위해 집을 나오고 있었다. 사실 학교로 가는 길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디를 가고 있었는지는 여기에서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아파트 경비실에 가까워지는 순간 나는 그 광경과 마주쳤다. 아파트 이름을 새긴 머릿돌 앞에 어린이용 킥보드, 내가 어렸을 때까지 사용하던 단어로는 씽씽카 한 대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날따라 오렌지색으로 빛나는 평소와는 다른 햇빛이 그 주변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그때 확신했다. 이런 광경은 처음 본다. 이 광경을 찍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떤 식으로든 남겨둬야만 할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을 흐지부지 흘려보내고 말았다. 그 씽씽카 옆에 씽씽카의 주인 아이가 있었더라면 더 완벽한 광경이었을 텐데 아쉽다,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것이 내가 가상으로 상정한 완벽한 광경의 흠이라 생각해서 굳이 찍지 않았을 수도 있다. 혹은 주춤주춤 걸음을 늦추며 휴대폰을 꺼낼까 말까 재는 사이 거길 벗어나버렸던 탓일 수도 있다. 굳이 몸을 돌려 그 순간을 포착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그리고 주황색 햇빛이 씽씽카와 주변을 비추는 순간을 그냥 지나친 후, 시간을 보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까 보았던 햇빛은 이미 사라졌고 씽씽카가 서 있던 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돌아왔을 때에도 그게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으면 하고 나는 내심 바라고 있었다. 물론 씽씽카의 주인 아이는 자기 물건을 보고 누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일말의 상상도 하지 않은 채 그의 물건을 집으로 가져갔을 것이다. 아주 어둡지는 않던 오후, 그러나 낮에 보았던 바로 그 햇빛과 탈것이 부재한 광경을 보면서 나는 아까 그걸 찍었어야 했어, 하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찍었어야 했다. 나는 그 순간을 영영 다시 겪지 못할 것이다.
(2) 이번에는 깊은 밤의 일이다. 겨울이었을 수도 있고 여름일 수도 있다. 이미 몇 년이나 지난 일이어서 기억이 흐릿하지만 계절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동일하다. 잠이 들기 전까지 나는 음악을 듣고 있었다. 그때는 휴대폰 대신 mp3로 음악을 틀어두었는데, 김동률의 음악을 듣고 있었다(고3일 때 그의 노래에 빠졌는데, 그 후로도 나는 그의 음악을 종종 들었다. 지금도 듣는다. 가사를 아주 잘 쓴다고 생각한다.). 어떤 한 곡을 반복재생해서 듣고 있었는지, 아니면 폴더 째로 재생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노래를 듣던 중 저절로 잠이 들었는데, 아주 깊은 잠으로 빠지기 전 어느 순간 잠에서 깼다. 사방은 캄캄하고 나는 반은 의식이 있었지만 반은 여전히 잠이 든 채였다. 여전히 mp3에서 음악이 나오고 있었고, 고독한 항해의 스튜디오 버전으로 1집에 수록된 같은 곡보다 웅장하게 편곡된 후반부의 기타 멜로디가 바로 그 순간 흐르고 있었다.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던 감각. 아주 잠든 것도, 아주 깬 것도 아닌 흐릿한 의식 속에서 나는 아주 충만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다음날 잠에서 깨어 그 꿈결 같은 순간을 되새기며 확신했다. 나는 이와 같은 순간을 다시 겪지는 못할 것이다.
(3) 이번에 이야기 할 경험은 때와 장소가 아주 뚜렷하다. 몇 년 전 여름 생애 처음 일본으로 해외여행을 갔다. 4박 5일의 일정 중 사흘째 되던 날, 수족관에 들어가기 전 수족관 건물 앞에 설치된 관람차를 탔다. 일행과 마주앉은 채 관람차를 타고, 관람차 안에 있는 곰 인형과 사진을 찍으며 두런두런 이야기하고 바깥을 내다보는 동안 관람차는 꼭대기를 지나 이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우리가 타고 있던 칸 바로 앞칸에 타고 있던 서양인 모녀를 볼 수 있었는데, 그들은 이미 수족관을 구경하고 나온 듯 꼬마아이는 돌고래 인형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들과 눈이 마주치고 나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이는 관람차가 돌아가는 그 틈 사이로 얼굴을 마주한 나를 향해 제 돌고래 인형을 들어올리며 자랑을 했다. 그게 너무 귀여워 호들갑을 떨었던 기억이 난다. 꼬마의 엄마가 들고 있던 카메라로 우리를 찍었고, 나도 휴대폰으로 돌고래 인형을 흔들어 보이는 아이와 엄마의 모습을 담을 수 있었다. 그때의 즐거움과 뿌듯함, 충만함이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관람차에서 내린 후에는 그들 모녀와 인사를 나누지 않고 바로 수족관으로 들어가 나는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그게 아쉽지는 않다. 그와 같은 경험은 내 생에 처음이었고 아마 다시 겪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전혀 모르는 타인과 스쳐 지나듯 공유한 그 순간에 나는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로잡혀 있다. 여행을 하며 맛있는 것을 먹고 멋있는 곳을 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사진도 많이 찍었지만 4박5일의 여행을 통틀어 가장 인상 깊고 행복하던 순간은 바로 그때였다. 그때와 같은 경험을 다시 할 수 있을까? 그때와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을까? 나는 ‘아니.’ 하고 확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 경험을 다시 겪었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과는 상관없이, 그것이 한 번뿐이며 그 순간뿐이라 여기는 지금 이 감정이 너무나 명확하기 때문이다.
믿을 수 없게도 이 순간들이 내가 꼽은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가장’이라는 표현에 세 가지의 경험담이라는 조합은 적절하지 않아 보이겠지만 나는 이 개인적인 경험들을 관통하는 공통적인 감정에 사로잡혔다. ‘이 순간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다.
사실 살아가는 모든 순간은 그 자체로 매 순간 새로운 경험의 연속이다.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이러한 확신은 논리적으로 아주 당연한 사실의 동어반복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내게 가장 아름다운 것, 저 확신의 순간들은 기계적으로 흐르는 시간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당연히 매 순간 새로운 시간을 산다. 그러나 또한 ‘비슷한’ 순간을 반복적으로 살고 있기도 하다. 생활 습관, 삶의 버릇들, 어떤 강박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같지는 않아도 비슷한 시간을 끝없이 영위하며 사는 것이다. ‘다시는 오지 않을 순간의 확신’은 앞으로 그와 비슷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과 같은 의미이다. 나의 의도가 개입되지 않은, 우연히 맞닥뜨린 선물 같은 순간. 그것은 집을 나서는 아주 익숙한 길 속에서 마주할 수도 있고, 잠을 잔다는 당연하고도 필수적인 생리 활동을 하는 중에 마주칠 수도 있다. 전혀 가본 적 없는 낯선 곳에서 만날 수도 있다. 나는 아주 자신 있게 장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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