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텍스트가 시간과 존재의 문제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요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언젠가 MIT 스쿨을 방문했을 때, 그곳의 미디어랩에서는 플라스틱으로 된 전자종이를 내게 보여주었어요. 양피지에서 펄프 종이를 거쳐 플라스틱 종이 시대가 오지 말란 법도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이퍼텍스트가 결코 전통적인 텍스트를 대체하지는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음악에다 비유하면 전통적인 텍스트는 권위 있는 악보에 바탕을 둔 클래식 음악에 해당하며, 누구나 한 줄 즉흥적으로 써 넣을 수 있는 열린 텍스트인 하이퍼텍스트는 재즈 음악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재즈의 즉흥 연주가 클래식의 악보 위주 연주를 대체하지 않는 것처럼, 하이퍼텍스트와 전통적 텍스트 역시 서로 공존해갈 것입니다.
ㅡ움베르트 에코, 「디지털매체, 책 말살하지 못 한다」, 『시사저널』, 1996.12.14
1. 디지털이란?
디지털이란 본디 손가락(digit)을 가리키는 말로 셈하는 것을 뜻한다.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셈을 하듯이, 디지털이란 일정한 양을 독립적으로 표현함을 말한다. 따라서 수(數)는 디지털을 가장 대표적으로 상징한다. 오늘날 전 세계를 통일하고 있는 아라비아 숫자도 시원적으로는 손가락의 모습을 닮았으며, 그 손가락의 특정한 모습은 각기 특정한 수를 가리킨다. 디지털은 이처럼 개별저거 양을 무엇보다도 우선시한다. 이런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과 저런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 사이의 값은 없다. 그런 점에서 그 값이 분명하고 확실하다.
우리가 피아노를 두드릴 때 건반(鍵盤)을 치게 되는데, 사실상 건반 하나하나도 디지털이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각 음들은 각자의 값을 지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악기 가운데 피아노가 디지털의 길을 앞서 갈 수 있는 것도, 건반의 독립적 성격 때문이다. 피아노는 선에서 음가(音價)를 낸다는 점에서 현악기(絃樂器)이지만, 그 선을 개별적으로 두들김으로써 음차(音差)를 낸다는 점에서 타악기(打樂器)의 성격을 띠는, 그래서 독립적으로 구분되는 건반악기이다. 우리가 음악교본으로 피아노를 꼽는 것은 그만큼 건반 곧 디지털의 정확도 때문이다. 그 건반은 늘 그 값을 지닌다. 현악기가 갖고 있는 음의 모호성을 타악기화 함으로써 정확성을 높인 악기가 바로 건반익기인 것이다.
2. 아날로그란?
오늘날의 문명은 숫자로 이야기해주길 바라고 있다. 그런 점에서 디지털 세계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얼만큼 사랑해?’라는 질문에 ‘이만큼’이라면서 두 손을 활짝 편다. 숫자적이지 않고 지시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지시성을 아날로그라고 부른다. 사랑에 대한 답으로 디지털적인 답은 아무래도 모든 것을 다하지 못한다. 그래서 두 손을 활짝 피며 아날로그적으로 사랑을 표현한다. 때로 숫자를 무한화시켜서 ‘만의 만의 만의 만’이라고 말한다 쳐도, 비록 디지털적인 사고로 답한 것이긴 하지만, 무한의 개념이 개입함으로써 그 역시 아날로그적 해답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디지털은 셈이며, 아날로그는 가리킴이다. 그 둘의 철학적 특징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디지털은 ‘나뉨’ 곧 분할(分割)이며 아날로스는 ‘이어짐’ 곧 연속(連續)이다. 디지털이 처음부터 정확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분할이 무한은 아닐지라고 극한까지 이름으로써 정확도를 높였고, 따라서 디지털은 정확성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다. 자동차의 계기판에서 바늘이 100km에서 왔다갔다 할 때 우리는 속도계에 찍혔는지 아닌지 걱정하지만, 숫자로 100km라고 쓰여 있다면 그것보다는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비록 근래의 바늘은 디지털이 많지만, 여기에서 바늘이란 아날로그이다 100은 디지털인 것이다.
디지털이 이처럼 우리에게 다가온 것은 다름 아닌 전기 때문이다. 이른바 전기신호란 기본적으로 (+)와 (-)의 값으로 나누어지며, 그것이 또한 극도로 분할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고급의 계산기인 컴퓨터라 할지라도 그가 0과 1이라는 이진법(二進法)의 계산밖에 할 수 없음은 바로 전기의 성질에 기인한다. 그러나 0과 1뿐이라 할지라도 숫자라는 점에서 호환(互換)이 보장되기 때문에 10진법과 진배없다. 정확히 말하면, 과거의 전기신호 송출의 방식은 ‘강약(强弱)’으로 구별되는 아날로그였지만, 현재는 ‘켰다, 껐다(on-off)’로 ‘단락(段落: 붙였다 땠다, 곧 연결과 단절)’되는 디지털인 것이다.
3. 1. 디지털의 효용
무지개를 보자. 우리는 그 무지개를 ‘빨간,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법은 서구적이다. 동양에서 무지개는 ‘오색영롱(五色玲瓏)’한 것이지, 결코 7색이 화려한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색도(色度)란 절대의 값이 있는 것이 아니다. 파랑도 하늘 색깔(sky blue)도 있고, 쪽 색깔(cobalt blue)도 있다. 하다못해, 희고 검은 것도 여러층차로 나뉘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무지개를 보여 우리는 색깔의 범주가 문화마다 다름을 쉽게 알 수 있다.

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