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아비
사실 ‘달려라 아비‘를 읽으려고 소설집「달려라 아비」를 집어든 건 아니었다. 책제였음에도 불구하고 난 요 작품만은 쏙 빼놓고 읽을 작정이었다. 아버지라는 소재를 이용한 눈물 쥐어짜기 식의 소설일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달려라‘라는 표현이 열심히 일하는 아버지를 격려해주는 응원의 목소리로 들려 서였다. 지루하고 따분한 이야기리라하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편의점에 간다」서부터 「노크 하지 않는 집」까지 어느 것 하나 벼려 낼 것 없는 김애란의 단편 8편을 읽으면서 생각이 확 바뀌어버렸다. 김애란, 이 작가라면 흔해빠진 아버지상을 다르게 그려낼 것만 같았다. 소설 한편 한편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김애란 이라는 작가의 매력에 흠뻑 젖어 들게 된 것이다. 과연 달려라 아비의 숨은 뜻은 무엇이며 작중 아비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작가는 소설 속에서 어떻게 아비를 그려낼 것인가. 궁금하고 설레는 맘으로 종전의 색안경은 벗어던진 채, 그렇게 나는 달려라 아비와 마주하게 되었다.
예상한 것과 달랐다. 달랐다 정도가 아니라 내 예상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빗나갔다. 아버지에 대한 감동적인 추억으로 눈물 빼는 식이 아니다. 외려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아버지를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눈에 띄게 화려한 표지에 그려진 야광 반바지와 그 밑 무를 뽑아다 놓은 것 같은 두 다리, 바로 달려라 아비에 나오는 주인공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어머니가 내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은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법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미안해하지도, 나를 가여워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고마웠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정말로 물어오는 것은 자신의 안부라는 것을. 어머니와 나는 구원도 이해도 아니다. 입석표처럼 당당한 관계였다.
「달려라 아비」의 ‘나‘는 택시운전을 하는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다. 서로를 연민하지도 않으면서 이해도 구원도 아닌 입석표처럼 당당한 관계로 말이다.
박봉,여자 기사에 대한 불신, 취객의 희롱, 그래도 나는 어머니에게 곧잘 돈을 달라고 졸랐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새끼가 속도 깊고 예의 까지 발라버리면 어머니가 더 쓸쓸해질 것만 같아서였다. 어머니 역시 미안함에 내게 돈을 더 준다거나 하는 일 따윈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가 달라는 만큼만 돈을 줬지만, "벌면 다, 새끼 밑구멍으로 들어가 내가 맨날 씨발, 씨발, 하면서 돈번다"는 생색도 잊지 않았다.
대부분의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보통 편모슬하의 자녀에게 어머니는 무척 미안해하고 안타까워하며, 자식은 또 감사해하거나 가슴아파하는 장면으로 많이 연출된다. 김애란의 소설에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소설 속의 ‘나‘는 아버지 없이도 잘 컸다는 이야기를 듣기위해 이를 악물고 더 열심히 살아간다던가 하는 모습 또한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어머니에게 특별히 더 잘한다거나 그 반대로 반항적인 모습도 찾아볼 수 없다. 아버지의 부재가 어쩌면 이 둘의 관계를 조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평생 이 남자의 하중을 견디며 살아보고 싶다는 잠깐 동안의 생각 때문에 ‘나‘의 엄마가 된 여자, "단 지금 당장 피임약을 사와야만 된다." 는 말 때문에, 달동네 맨 꼭대기부터 약국이 있는 시내까지, 세상의 온 힘을 다해 하얀 연탄재를 뒤집어쓰고도 달리고 또 달린 ‘나‘의 아버지.
‘나‘의 존재가 태어나게 된 내력이다. 여기서 아버지는 극도로 희화화된다. 달리기라고는 하지 않는 분이 이 날 이 때 만큼은 누가 떠밀지 않아도 달리고 또 달린다. 그것도 엄청나게 무서운 속도로 말이다. 어머니를 안기 위한 단 한가지의 이유로. 위의 대목을 읽으면서 아버지라는 존재가 참 한심하게 느껴졌다. 일생에 단 한번 뛰었다는 게 고작 저런 이유 때문이라니… …. 그에게선 그 어떤 자그마한 열정조차 느껴 지지 않는다. 만일 내 아버지였다면 아버지라는 사실이 수치스러웠을 것만 같다. 생각조차 하기 싫은 아버지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작중 ‘나’의 머릿속에서 마음속에서 아버지는 살아가고 있다. ‘나‘의 머릿속에서 달리고 있다. 미국에서 날아온 편지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한 이 후에도 쭉 화자는 아버지를 뛰게 만들고 있다.
내가 아버지를 계속 뛰게 만드는 이유는, 아버지가 달리기를 멈추는 순간, 내가 아버지에게 달려가 죽여 버리게 될까봐 그랬던 것은 아닐까. 그러자 갑자기 나는 서러워졌고, 그 서러움이 나를 속이기 전에 빨리 잠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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