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3남 4녀 중 장남이시다. 여느 가정에서도 그렇듯 장남이라는 자리는 꽤나 특별한 의미라서 아버지는 형제들 중에서도 남다른 대우를 받고 자라셨다. 아버지에게 보약을 먹이기 위해 할머니께서 동네 뒷동산에 달려 올라가신 얘기라든지, 고깃국에서 살코기는 항상 아버지 몫이었고 비계는 작은 아버지 몫이었다는 얘기들은 우리 집에서는 유명하다. 어찌 됐건 요즘 말로 완전 소중하게 자란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와 수년간의 열애 끝에 결혼에 골인하셨고 우리 가족이 보기엔 가장 예쁜, 내가 세상에 첫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나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새카만 피부하며 진한 눈썹이라든지 뻣뻣한 머리카락은 영락없는 아버지다. 우리 아버지는 꽤 잘생기셨지만 나의 어릴 때 사진을 보면 참 못생겼다. 반론의 여지가 없다. 딸이 아버지를 닮으면 잘 산다는 말은 그런 딸들을 위로하기 위해 생긴 말이 아닐까. 우리 가족은 그야말로 사랑의 가족이다. 특히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시다. 나는 밖으로는 볼썽사납다고 투덜대지만 속으로는 부모님의 그런 모습이 너무 좋다. 다른 친구들은 부모님께서 싸우실 때 전화기가 부양하고 식칼이 날아다닌다 하는데 우리 집에서 그런 일은 절대 없다. 부모님은 집안에서나 바깥에서나 서로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으신다. 몰랐었는데 동생과 나 몰래 데이트도 즐기신단다. 가끔 어머니께서 외가댁에 오시면 아버지가 보내신 닭살 문자를 무료로 얼마든지 관람할 수 있다. 아무 날도 아니지만 장미꽃 한 다발을 사 들고 들어오는, 휴일에는 집안일을 도와주는, 어딜 가든지 어머니와 함께 가려고 하시는 분이 우리 아버지다. 결혼한 지 20여년이 지나가는 지금 한결같이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 아버지께서는 내 이상적인 남편상이고 부모님은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커플이다.
정말 어렸을 적 이야기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 가족은 주말이면 거의 교외로 나들이를 했고 나는 항상 아버지의 손을 잡았던 것 같다. 내 손으로 아버지의 엄지손가락을 감싼 채 참 많은 곳을 다녔다. 모르긴 해도 한국에서는 가보지 않은 곳이 드물 것이다. 그 때는 참 아버지가 커 보였다. 아버지께서 목마를 태워주시면 내 눈 앞에 펼쳐진 세상은 더욱 넓었고 더욱 아름다웠던 것 같다. 그렇게,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려 하셨고 실제로도 그랬다. 아버지와 가족들과 많은 곳을 갔지만 내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000년도에 갔던 지리산이다. 지구 종말론부터 시작해서 온 지구가 떠들썩했던 그 때, 1999년 마지막 날에 TV를 통해 타종하는 모습을 보다가 우리가족은 갑자기 지리산으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예정에 없던 터라 심지어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는 구두를 신으신 채였다. 지리산을 오를 때의 그 밤하늘이란, 정말 까만 천에 누군가 수를 놓은 것처럼 아름다웠다. 2000년 1월 1일의 일출을 보고 싶었지만 우리는 산 중턱에서 돌아와야만 했다. 힘든 것도 힘든 것이지만 복장이 알맞지 않아서 눈 쌓인 지리산을 더 올라가는 것이 무리였기 때문이다. 눈 쌓인 산은 올라갈 때보다 내려갈 때가 더욱 힘들었다. 발이 푹푹 빠지는 미끄러운 바닥. 아버지는 앞장서셨다. 나는 그 때 아버지가 과하신 게 아닌가, 나도 혼자서 잘 갈 수 있는데 왜 그러실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그 때는 참 위험한 상황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산꼭대기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고 우리는 급히 조달한 작은 랜턴 하나로 눈 쌓인 산을 내려가야 했던 것이다. 그 때 아버지가 없었다면 길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인생도 그렇다. 아버지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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