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한 이유 및 일본의 근대화에 내포된 한계점에 대해서 서술하시오 (450자 이상) [11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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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세계의 역사
1.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한 이유 및 일본의 근대화에 내포된 한계점에 대해서 서술하시오
(450자 이상) [11점]
일본은 더 이상 외세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미일친화조약,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맺은 후,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 연달아 조약을 맺었다. 천황 입장에서는 자신이 허락한 적도 없었는데, 막부에서 그것을 결정한 것이므로 자신의 권위가 무너진 것이라 판단해 막부타도운동를 전개한다.
무역개방 이후 일본은 경제 균형을 잃었다. 급여생활자들인 사무라이들이 힘을 잃자, 막부도 힘을 잃었다. 반대로 힘을 얻은 왕정복고를 주장하던 막부반대파들은 쇼군들의 관직, 영지 반납을 요구하며 사무라이 시대의 종결, 메이지 시대의 시작을 열었다.
메이지 시대를 열면서, 천황은 중앙정부의 힘을 강화하기 위해 사무라이들만 칼을 찰 수 있었던 규칙을 제거하고, 국민들의 신분질서를 폐지하였다. 토지 조사를 새로 실시한 이후, 조세 구조를 새로 구성하였다. 그 사이 특권을 상실한 사무라이, 추가된 서민들에게 반발을 샀지만, 천황을 보필하는 지역세력 중심 내각들이 체제를 세워 통제하였고, 1947년 일본 헌법이 새로 들어서기 전까지 근대 일본을 통치하는 법으로서 작용하였다.
하지만, 일본 근대화는 내부적으로 스스로 이룬 것이 아니라, 외부의 개입에 의한 것이며, 막부의 사무라이들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새롭게 등극한 왕권의 복고이므로 천황은 허수아비에 가까운 존재였다는 것이 한계라 생각한다.
2.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 두 폴리스인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비교해서 서술하시오(700자 이상) [17점]
스파르타는 정복민 도리아인들이 세운 국가이다. 도리아인들은 5~10%의 소수 시민들로 구성된 국가이다. 이들은 피정복민 헤일로타이, 주변인인 페리오이코이 위에 군림하여 감시, 탄압으로 국군주의 국제, 전 시민들의 전사화, 중장보병체제를 가장 먼저 도입하였다. 스파르타 체제에서 시민들은 전체 국민들 중 소수에 속했으므로 귀족정적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당시 폴리스의 정치 체제인 민주정의 성격을 엿볼 수도 있다. 스파르타 시민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말이다.
한편, 스파르타는 하상 외세 및 외부의 침입에 취약하게 노출된 지역에 자리하고 있었으므로, 모든 시민들에게 군인이 되기를 강요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20세부터 60세까지 의무적인 병역을 지웠다. 대신 균등한 규모로 토지를 분배 받았다. 노예 계급인 헤일로타이들은 경작을 담당하여 국가가 운영될 수 있었다.
스파르타의 특징이 있다면, 시민들 간의 관계는 모두 군인이므로 동등한 관계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때문에 정치적 요소, 사회체제로 오랜 어려움을 겪던 주변 그리스인에게 선망의 국가, 동경의 국가로 칭송받았다.
한편, 아테네는 도리아인들에게 자기 방어를 하기 위해 수립된 공동체이다. 폴리스에서 가장 먼저 민주화를 한 폴리스로, 활발한 해상활동으로 상공업의 발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빈부의 격차로 인하여 부채노예로 전락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조정자 솔론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금권정치를 실시, 부채노예를 금지하고, 아테네 시민을 재산에 따라 차등적인 정치참여권을 주었다. 이 조정에는 귀족, 평민이 모두 불만이 많았다. 때문에 페이시스트라토스를 중심으로 한 비합법 정권 수립 이후, 귀족들의 행정적 실권이 무너지고, 토지분배, 상공업 장려, 대규모 토목공사, 공공제전으로 민중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체제 전복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하지만, 기존 체제 및 제도를 변화하지 않고 실권만 변화한 통치는 결국 붕괴를 맞이하였다.
이후, 민중들은 참주정에서 덴 상처를 민주적 행정개혁을 이끈 클레이테네스를 지도자로 세운다. 이후 민중 자치구역 데모스를 기반으로 10개의 행정부족을 분류하고, 민중에 의한 민주정치 기틀을 마련, 시민들의 민회에서 최종의결권을 결정하는 민주주의의 시작을 걸었다. 하지만 모순된 요소들이 적지 않았다.
3. 19세기 유럽에서 나타난 보수주의와 자유주의를 비교해서 서술하시오 (700자 이상) [17점]
에드먼크 버크로 대표되는 보수주의는 역사, 전통, 공동체를 중요한 맥락으로 내세우며, 개인, 자유, 평등, 진보 이념을 부정하였다. 이에 따르는 사회운동, 자유주의, 민족운동을 탄압하였다. 1830년 7월 혁명 전까지 보수주의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이들은 프랑스 혁명을 되돌려, 다시 절대주의 시대로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를 위해서라면, 혁명정신, 민족주의 정신을 척결해야 했다. 범유럽적인 시대적인 과제였음으므로, 하나의 국가 힘만으로는 역부족이기에 이들은 신성동맹, 사국동맹 등 유럽협조체제를 구성하여 움직였다.
반면,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사상가 존 로크를 중심으로, 계몽사상가들에 의해 “출생보다 교육이 중요하다.” 라는 맥락으로 사회에 영향을 미쳤으며, 17-18세기에 일어난 시민혁명으로 자유주의의 기반을 닦았다. 이들은 국가권력, 권위를 비판하며, 헌법제정, 자유선거, 대의제 정부, 권력 분립 등 개혁을 요구하였다. 빈체제가 싸우는 저항 세력이 바로 자유주의 진영의 인사들이다.
자유주의 진영을 구성하던 이들은 귀족들에게 저항하면서, 신흥 계급 및 자본층인 자들에게 노동력을 제공해줄 수 있는 노동자들을 설득하는데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즉, 사회정치적 지배력과 자유주의를 투 트랙으로 운영한 것이다. 결국 대립적이었던 두 사상은 결국 지배력을 확립한 자유주의 진영의 부르주아지들이 보수주의 쪽으로 기울어 가면서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한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향후 노동운동 및 사회주의 세력을 구성하는데 있어 노동자들을 자극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의 불씨를 둔
하고 싶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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