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단체] 독도와 일본의 시민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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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시민단체] 독도와 일본의 시민 사회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설
Ⅱ. 한일 양국의 시민단체
1. 한국의 시민단체
(1) 역사
① 4.19
② 유신 체제 반대 운동
③ 서울의 봄
④ 6월 민주화 운동
⑤ 민주주의의 내실화
(2) 특징
(3) 장단점
① 장점
② 단점
2. 일본의 시민단체
(1)역사
① 안보투쟁
② 주민운동
③ 혁신자치제
④ 네트워크형 운동
⑤ 볼런티어 운동
(2) 특징
(3) 한국의 시민운동과 관련해 장단점
① 장점
② 단점
Ⅲ. 양 국의 시민단체의 독도문제에 대한 태도
1. 문제점
(1)우리 정부의 입장
① 서설
② 우리의 주장 및 논거
③ 국제사회 상황과 우리의 입장
(2) 일본정부의 입장
① 일본정부의 주장과 근거
② 일본 주장의 허구성
2. 독도의 역사와 그 가치
(1) 역사
(2) 가치
① 경제적인 면
② 군사적 및 해양 과학적인 면
③ 지질학적인 면
3. 한국의 시민단체
① 반크란
② 활동에 대하여
(1) 일반적 활동
(2) 주요 프로젝트
③ 조직 운영에 대하여
④ 반크에 대한 평가에 대하여
⑤ 반크의 독도에 대한 인터뷰 내용
(1) 현재의 독도상황
(2)독도에 대한 정부시책
(3) 정부시책에 대한 비판
(4) 단체의 활동 및 활동 방향
(5) 일본 시민단체의 태도
4. 일본의 시민단체
Ⅳ. 결어

본문내용
Ⅰ. 서설
이하의 주제는 한일양국의 시민단체에 대한 비교가 주가 되는 바, 먼저 양국의 시민단체의 특징을 살펴보고 아를 비교하기 위하여 그 탄생배경에 대한 조명이 필요하다. 따라서 양국시민단체의 역사에 대하여 살펴본 후 그 특색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이후에는 이러한 양국 시민단체의 구별되는 특징에 대하여 구체적인 독도문제에 대한 태도를 살펴 그 차이를 분명히 밝혀 보자 한다.
특히 한국의 독도에 관한 활동을 하는 시민단체로서 반크의 활동에 대해서 이하에서 살펴보겠다.

Ⅱ. 한일 양국의 시민단체
1. 한국의 시민단체
(1) 역사
① 4.19
한국은 1910년 한일병합 이후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46년 동안 일본의 식민지였다. 이러한 일제 식민지 시기에도 3.1운동 등 시민이 참여했던 운동은 있었지만, 이것은 민족운동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므로 여기서는 ‘시민운동’의 범주에서 제외하기로 한다. 광복 이후에도 미군정에 의한 지배, 1950년부터 1953년까지의 한국전쟁으로 인해, 한국은 오랫동안 시민사회가 발달할 만한 토양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4.19는 1960년 이승만 자유당의 3.15 부정선거로 인해 발생했다. 1960년 3월 15일 경상북도 마산의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로 3.15 마산시위가 발생했는데, 정부는 시위대에 대해 발포하는 등 강경진압을 일삼았다. 게다가 여기서 실종된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체가 한 달쯤 지난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머리에 최루탄이 박힌 채 떠올랐고, 이로 인해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된다.
60년 4월 19일에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총궐기 선언문을 발표하며 4.19 혁명이 시작됐다. 23일에 장면 부통령이 사임했고, 25일에는 대학교수들도 시위에 나섰다. 결국 4.19는 다음날 26일,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이 가족과 함께 자살하고,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면서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뒤이어 집권하게 된 장면내각의 민주당 정권은 시민들의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잇달았고, 결국 9개월 후인 61년 5월 16일, 5.16 군사정변에 의해 붕괴되었다.
4.19는 광복 이후 최대 규모의 전국적인 시민운동이었다. ‘부정 선거 다시 하라’는 구호로 시작된 이러한 시민운동은 이승만 정권의 퇴진이라는 기대 이상의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이로 인한 민주주의는 박정희 등 육사 8기생들의 정변으로 완성되지 못하고 미완의 혁명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이후 시민운동이 ‘민주화 운동’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② 유신 체제 반대 운동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1967년에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종래의 헌법은 대통령직을 1번에 한해 중임할 수 있었으나, 박정희는 3선개헌을 통해 자신이 다시 대통령에 출마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야당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국민들의 불신도 심화되어 1971년의 선거에서는 야당 대표였던 김대중을 가까스로 이긴다.
그렇게 박정희가 간신히 김대중을 누르고 3선에 성공한 후, 일부 학자들과 검사들에 의해 유신 헌법안이 만들어져 12월 27일에 발효된다. 72년 10월 17일에는 ‘대통령특별선언’이 발표되어 국회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금지 등 헌법의 일부 기능을 중지시키고 비상계엄령을 발표한다. 유신 헌법은 대통령 직선제를 간선제로 바꾸고, 대통령에게 헌법의 효력을 일시 정지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권을 부여했으며, 대통령의 임기를 6년으로 보장하고 연임 제한을 철폐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에 반대하며 부산과 마산 등에서 ‘유신철폐’를 외치는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이를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하는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가 박정희와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을 살해하는 10.26 사건이 발생한다. 이는 박정희 유신 체제의 몰락을 가져왔지만, 이는 급작스런 권력의 공백을 가져와 전두환, 노태우 등의 신군부에게 정권을 장악할 기회를 주는 계기가 되었다.

③ 서울의 봄
10.26 사건에 의해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암살된 직후, 시민들 사이에서는 유신 체제가 끝나고 민주화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고조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 많은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79년 11월 24일, 함석헌, 박종태, 임채정 등이 결혼식을 위장해 계엄군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비판하는 내용의 집회를 열었고, 80년 5월 15일에는 서울역 앞에서 계엄 철폐를 주장하는 시위도 있었다. 하지만 신군부는 군사독재 권력 연장 야욕을 숨기지 못했다. 79년 12월 12일에는 12.12 사건을 일으켜 군부 내 반대파들을 숙청하는 등 권력 획득을 위한 계획을 진행시켜 나갔다.
서울역 시위가 있었던 5월 15일 이틀 후, 전두환은 계엄 조치를 전국으로 확대하게 되고, 이에 반발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는 27일, 계엄군의 총공세로 많은 사상자를 내며 종결되었고, 이로 인해 서울의 봄도 끝나게 되었다.

④ 6월 민주화 운동
87년 1월 14일, 학생운동을 하다가 공안당국에 끌려 온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의 물고문을 받다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정부 측에서는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습니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