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승훈의 교육사상
3. 교육사적 의의
3월 25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했다. 정주에서 납청정으로 이사를 하고 7세부터 11세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동몽선습, 무제시, 소학, 맹자 등) 아버지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고아가 된 남강은 학업을 중단한 채 생계를 꾸려야 했다. 그래서 임일권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방사환으로 일하게 되었다. 남강은 14세까지 임일권의 집에서 있었는데 임일권은 유기 상공업을 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여기에서 유기 제조공정과 상업 경영의 거래 기술을 익혔다. 또한 이곳에서 그는 성실과 정직함을 인정받아 수금원의 직책을 맡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보부상을 시작으로 유기 공장 운영과 판매, 무역상과 운수업을 하는 등 그의 경영능력과 성실성을 충분히 발휘하여 재계에 이름을 떨쳤다. 즉, 개인 남강으로서 그의 기업 능력을 통하여 대성한 성취의 시기였다. 그는 이도제의 딸인 이경강씨와 결혼을 하고 자립하여 보부상으로 장사를 시작했는데, 특히 남강은 이 시기에 정주와 황해도를 돌아다니며 장사뿐 아니라 자연과 지리에 대한 견문도 익히며 여러 사람을 사귀었고 나라 안,밖의 소식들도 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정주, 납청, 고읍에서 장사를 하다가 점차 평안도 일대를 다니게 되었고 나중에는 황해도의 안악, 재령, 봉산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23세까지 보부상으로 착실한 기반을 닦았다. 보부상을 청산하고 납청정에 들어와서 오희순이라는 유지의 도움을 받아 유기 공장과 상점을 차려 사업을 시작했으며, 서울과 평양을 왕래하면서 상점 경영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남강의 유기 공장은 환경 조건이나 노동자 처우에 있어서 매우 모범적이었기에 타 공장과 비교되기도 했다. 한편, 오산의 용동에다 이(李)씨의 친족촌을 만들고 서당을 마련하여 자제들의 교육에도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과 청나라의 전쟁터가 되었던 황해도와 평안도는 이들에 의해 폐허가 되었고, 남강도 힘없는 나라의 백성이었기에 그 동안 쌓은 노력은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그러나 그의 신용과 정직함을 아는 오삭주(오희순)의 계속적인 도움으로 이듬해에 재기하였다. 청일전쟁 후 5년만에 그는 벌써 평양에 큰 상사를 다시 개설하고 납청정과 진남포 등에 지점을 두었으며, 서울과 인천을 통하여 외국과 거래하여 국제 무역상으로 자리를 굳혔다. 남강은 경인선을 비룡산 철도의 개통과 외국 상선이 입항할 것을 미리 알아 운송 사업을 개시했는데 서울과 평양에 설립한 운수회사는 우리나라 운송 사업의 시초가 되기도 했다. 1905년에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모든 자본과 경영권을 정리하고 재계에서 은퇴하여 용동으로 돌아왔다. 이는 망국의 한을 느끼고 시국의 아픔을 본 것으로 이런 태도는 그의 사생활을 정리하고 공생활로 탈바꿈하는 준비 시간을 갖게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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