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유산] 광개토왕릉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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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문화유산] 광개토왕릉비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광개토대왕릉비의 발견과 연구
비문의 내용
광개토왕릉비를 둘러싼 100년 동안의 논쟁
1775자가 담은 역사
본문내용
광개토왕릉비는 고구려 고도 국내성(國內城), 현재는 행정구역상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위치하고 있는 거석비로, 고구려의 발전에서 하나의 획기적인 계기를 열어놓은 광개토왕(제위 391~412, 39세)의 공훈을 찬양하여 세운 기념비이다. 능비는 몸돌(碑身)과 받침돌(臺石)로 이루어져 있는데, 몸돌은 기본적으로 사각기둥 모양으로, 무게 37톤, 높이 6.39m, 너비 1.3~2.0m 의 반듯하게 가공되지 않은 천연석이다. 응회암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화산암질 현무암이라는 의견도 있다. 받침돌은 화강암을 다듬어 만든 길이 3.35m, 너비 2.7m의 네모진 모양으로 홈이 있어, 여기에 몸돌을 세웠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세 조각으로 깨져있는데, 제작 당시에 몸돌의 하중을 이기지 못해 깨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문을 새겨 넣은 형식은 매끈하지 않은 각 4면에 비문이 들어갈 윤곽을 긋고, 다시 그 안에 세로로 길게 선을 그어 각 행을 구분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곡면의 자연미와 직선의 인공미의 절묘한 어울림을 이루어 냈다.
동남의 제1면에 11행 449자, 서남의 제2면에 10행 387자, 서북의 제3면에 14행 574자, 동북의 제4면에 9행 369자, 4면을 합하여 총 44행 1775자가 새겨져 있으며, 이 중 150여자가 훼손되어 읽을 수가 없다(224자가 훼손되었으나 문맥상 추정하거나, 일부 남아있는 형태에 따라 추정하여 판독 가능해진 자들이 있다. 추정하는 학자에 따른 개인편차를 평균하여 약 150여자가 판독 불가능한 것으로 추정된다).
광개토왕릉비에 대한 기록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성현의 ‘황성을 바라보며(望黃成郊)’, 신충일의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에 잠깐 언급이 되어있으나, 막연히 금나라 황제의 비 정도로 오인되었던 것으로 보여, 그 연구가 일찌감치 이뤄지지 못했다.

광개토대왕릉비의 발견과 연구
고구려 멸망(668)이후, 특히 발해의 멸망(926) 이후 이 비는 보호, 관리하는 사람 없이 그냥 방치되었다. 17세기에 들어 만주족의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시조의 탄생지인 집안 일대에 사람을 살 수 없게 한 봉금(封禁)정책을 편 것이 계기가 되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혀졌다. 이후 농경지의 확대로 이 일대에 사람들이 정착하면서 봉금정책이 풀리고 다시 사람들의 왕래가 시작되면서 한 개간농부에 의해 발견되어 정부 차원의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되었다.

비문의 내용
능비문의 내용은 크게 3단으로 나뉘는데, 제 1단(제1면 1행 1자~6행 36자, 총 241자)은 고구려 시조 추모왕(동명왕)이 나라를 세운 경위와 그 후 역대 왕들의 계승관계, 광개토왕의 치적에 대한 총평, 산릉의 축조와 능비 건립의 목적을 쓴 것이다.
제 2단(제1면 6행 37자~제3면 8행 15자, 총 897자)은 광개토왕의 공훈, 업적을 연대별, 사건별로 서술한 것으로서 북방으로는 비려, 식신, 동부여를 정벌하여 국위를 선양하고 영토를 크게 넓힌 사실, 남방으로는 백제, 가야, 왜와의 싸움에서 결정적 타격을 주고 백제의 많은 성들을 차지함으로써 역시 고구려의 위력을 과시하고 영역을 넓혔으며 신라를 도와주는 동시에 더 강하게 통제, 장악하게 된 사실을 쓴 것이다.
제 3단(제3면 8행 16자~제4면 9행 41자, 총
참고문헌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 분과 / 푸른역사
사회과학원 / 중심
박진석 / 아세아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