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요약][고대사] 광개토대왕비 및 삼국사기에 보이는 왜병의 실체
2. 광개토왕릉비에 보이는 왜병
3. [삼국사기]에 보이는 왜병
4. 맺 음 말
2. 廣開土王陵碑에 보이는 倭兵
광개토왕릉비문의 내용을 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및 왜의 군사적인 관계뿐 아니라 외교관계도 알 수 있는 자료가 제시되는데, 아래의 신묘년조의 기록은 그 해석에 있어 많은 견해가 제기되었다.
가. (1) ⒜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 ⒞百殘東 * 新羅以爲臣民( 8행 34자-9행 24자) : 백잔(백제를 낮춰 부른 말)과 신라는 옛날에는 우리의 속민이었고 그전부터 조공을 바쳐왔던 것이다. 그런데 신묘년에 왜가 백잔의 꾀임으로 도래하자 백잔을 격파하고 동쪽으로 신라를 구원하여 신민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 내용을 위와 같이 간단히 요약할 수 있으며 그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락 6년에는 광개토대왕의 백제 토벌 사유가 기록되어 있으며, 영락 9년 백제와 왜가 화통하고 신라를 공격 하였고, 영락 10년에 이르러 광개토대왕은 5만명의 보병과 기병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영락 14년에는 왜가 백제와 화통하여 대방의 경계까지 침입하여 왜와 두 번에 걸친 전투를 벌였다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이 광개토대왕비의 사료를 통하여 고구려, 백제, 가야, 왜의 당시 군사적인 외교 관계를 알 수 있는데 이 사건의 사실 여부를 밝히기 위해서는 [삼국사기]의 박제상전을 주목해 볼 필요가 했다. 박제상전의 내용은 신라의 제상이었던 박제상이 왜에 볼모로 잡혀간 미사흔을 귀환시키기 위한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당시 왜의 신라에 대한 경계와 아신왕의 태자 진지가 볼모로 온 것을 보고 왜와 백제와의 관계를 알 수 있다. 광개토대왕릉비와 박제상전의 두 기록을 비교하여 당시 고구려 신라 백제 왜 또는 가야 사이에 벌어진 군사적 관계의 실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박제상전의 기록에서 입증 해주듯이 왜가 병력을 파견하여 신라 밖의 국경 밖을 순라 한 것은 분명하여 왜는 신라와 고구려의 공격에 대처하기 위해 왜병을 파병한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 왜병이 침입한 지역이 어디였는지 알아보기 위해 기록을 살펴보면 영락 10년에 고구려가 신라를 구원할 때 신라 밖의 남거성에서 신라 국경의 성 사이에 왜병이 있었으나 신라가 왜병을 막아 더 이상 신라 지역을 공략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시 왜병이 머물렀던 국경 밖은 바다가 아닌 육지로 가야 지역으로 추측된다.
셋째, 399~400년까지 신라의 국경 밖에 파병되어 있던 왜병의 규모를 살펴 볼 때 왜는 신라의 영토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신라의 국경 밖을 사수하기 위한 파병으로 규모는 크지 않았으며, 고구려와 맞서 싸운 것은 왜병과 가야의 연합군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넷째, 박제상전에 고구려군이 와서 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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