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인문화사] 멀라까해협의 화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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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마인문화사] 멀라까해협의 화란인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멀라까 해협을 둘러싼 무역 경쟁
화란의 멀라까 점령
화란과 부기스(Bugis)의 충돌
멀라까 왕국과 화란의 쇠퇴
본문내용
1. 멀라까 해협을 둘러싼 무역 경쟁

유럽의 열강들, 즉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는 본질적으로 영토의 정복보다는 무역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멀라까의 무역항을 통해 인도네시아와의 무역뿐만 아니라 그 밖의 현지무역도 통제할 목표를 갖고 있었다

포르투갈인은 1511년 멀라까를 점령, 그들의 동남아시아 거점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멀라까로 항해는 강력한 아쩨 술탄왕국의 도전으로 인해 항상 불안

이러한 상황은 동인도회사를 중심으로 화란인이 이 지역에서 활동을 시작하고, 이스깐다르 무다 술탄의 통치하에 아쩨의 대외 팽창이 절정에 달했을 무렵인 17세기 초의 몇 십년 동안 위기로 발전

Iskandr Muda는 멀라까 해협에 대한 완전한 지배권을 얻기 위해 외세뿐만 아니라 토착세력을 제거하는 데도 동등하게 심혈을 기울였다. 아쩨는 구멀라까 술탄왕국의 수도 바뚜 사와르(Batu Sawar)를 점령하고 1612년과 1615년에 연이어 침략

2. 화란의 멀라까 점령

화란의 멀라까 정복전쟁은 1640년 6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6개월 간 지속되었다. 포르투갈인은 용감히 싸웠으나, 심각한 기근으로 인해 도시의 인구가 급격하게 감소했고, 마침내 굴복하게 되었다.

화란은 포르투갈과 달리 사업과 종교를 연관 시키지 않았으며 개신교의 전파에 적극적이지 않음.

화란인은 주석을 독점할 방법으로 포르투갈령 멀라까의 속국이였던 나닝(Naning)과 름바우(Rembau)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

1641년 화란인은 조약을 통해 나닝과 름바우의 곡물과 식량, 특히 멀라까 주민들에게 중요한 쌀과 가축의 정기적인 유입에 대해 10%의 세금을 부과했다. 그러나 나닝과 름바우 주민들의 반발로 인해 세금징수를 포기.

화란은 주석과 직물무역에 대한 완전한 독점권의 획득이라는 목표를 위해 대개 독점조약을 체결 했고, 조약이 준수되지 않을 경우 보복을 가했다.

그 결과 주석생산지와 멀라까 북부지역으로 항해하는 모든 선박은 우선 화란의 통행허가를 취득해야 하는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약이 잘 이행되지 않았고, 이 때문에 화란은 주의 지배세력인 아쩨를 이용해 압력을 가했다.

술라웨시 출신인 부기스(Bugis)인들의 주석생산 지역에서 그들의 성장과 상업적인 우세는 화란에게 걸림돌. 주석자원에 대한 실직적인 영향력을 행하면서 부기스는 우수한 항구시설을 갖춘 리아우(Riau)에 무역 중심지를 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