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본론
3. 결론
군주주권을 전제로 하였던 탓에 ‘헌법에 의한 정치’, 즉 입헌주의의 의미는 ‘국민주권’을 취한 프랑스와는 전혀 달랐다. 전통적인 군주주권론에 의하면 국왕은 통치권의 소유자이므로, 국왕과 국왕이 이끄는 정부는 헌법상의 명확한 수권이 없더라도 헌법에서 명시적으로 금지 또는 제한하고 있지 않은 것은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헌법은 수권규범이 아니라 제한규범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의 ‘근대화’도 ‘위로부터’이루어진 것이었다. 1869년에는 판적봉환(版籍奉還)이 이루어졌고, 1871년에는 폐번치현(廢藩置縣)이 이루어졌으며, 1889년에는 「대일본제국헌법」(이하 「메이지 헌법」으로 통칭하기로 한다)이 공포되었다. 당시 선발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이미 독점자본주의 단계에 돌입하였고, 제국주의적 해외진출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시의 일본 지배층은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였다. 메이지 유신 정부는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수립하여 근대화를 이룩하고자 하였다. ‘부국강병’(富國强兵), ‘식산흥업’(殖産興業)과 같은 슬로건은 이때 사용된 것이다. 1850년 「프로이센 헌법」의 경우와 비교하더라도, 「메이지 헌법」은 사회경제적 조건의 제약, 국제환경의 차이로 인하여 한층 더 외견적인 입헌주의 헌법일 수밖에 없었다. 메이지 헌법에서는 ‘인권’보장이 아니라 ‘신민의 권리’라고 하여 주로 자유권이 보장되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프로이센 헌법」에서의 자유권보다도 제한된 것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메이지 헌법은 일본형 왕권신수설에 기초하여 천황주권을 취하였다.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한다”(제1조), “천황은 국가의 원수로서 통치권을 총람하고, 이 헌법 규정에 따라 통치권을 행사한다.”(제4조)라고 하여 아마데라스 오오미까미(천하를 다스리는 위대한 신)의 자손인 천황이 통치권의 총람자로서 영원히 통치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메이지 헌법은 외견 입헌주의 시민헌법이었다. 그것도 1850년의 프로이센 헌법에도 미치지 못하는 외견성만이 눈에 띄는 그런 헌법이었다.
세번째는, 민중의 헌법사상이다. 이는 민중을 주요 담당자로 하였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본격 전개를 부정하거나 소극적이었다. 그들은 근대 입헌주의 시민헌법보다 더 충실한 인권보장과 ‘인민에 의한 인민의 정치’를 철저히 요구하였다.
근대 시민혁명기에는 근대화 즉 자본주의화와 입헌주의화를 지향하여 의회를 중심으로 결집한 부르주아 계급과는 별도로 의회 밖에서 민중의 해방을 지향한 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독자성 풍부한 행동을 전개하였다. 영국에서도 청교도혁명기의 ‘수평파(Levellers)'등의 사상과 운동이 있었다. 그러나 부르주아 계급과는 다른 민중헌법사상이 체계성을 갖추고 나타났던 것은 프랑스혁명 때였다. ’상퀼로트(les sans-culottes)운동‘과 ’농민혁명‘이 그것이다. 프랑스혁명기에는 과도적이기는 하였으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봉건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부르주아계급과 민중이 일치된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봉건체제 타도 후의 정치와 사회에 대해서는 의견이 같지 않았다. 물론 당시의 민중 생활을 보면 민중 일반이 부르주아 계급과 다른 이해를 자각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민중의 자각적인 부분이 이를 의식하고 민중해방을 위한 헌법사상과 인권선언을 공표하고, 민중운동을 조직하고 프랑스혁명에 무시할 수 없는 많은 영향을 끼쳤다. 상퀼로트운동의 이론적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의 바를레(J-F. Varlet)의 문서들과 ‘바뵈프(Babeuf)음모’등은 이를 구체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바를레는 상퀼로트 운동이 고양되었던 1792년 여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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