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 문제의식 및 접근방향
Ⅱ. 국내 좌·우익 세력 간의 갈등 심화
1. 여수·순천 사건
2. 반민특위 사건
3. 국회 프락치 사건
4. 김구의 암살
Ⅲ. 주요사건에 대한 다양한 시각
1. 농지개혁
2. 남로당의 무장투쟁
Ⅳ. 맺는말
3. 국회 프락치 사건
국회 프락치 사건은 1949년 6월, 소장파 의원 지도자들을 남로당 프락치 등으로 재판에 회부한 사건이다. 소장판 의원들은 반민법과 농지개혁법 제정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도지사는 간접선거로, 시·읍·면장은 직접선거로 하는 지방자치법의 즉시 실시를 촉구했고, 국가보안법 제정도 반대했다. 그와 함께 소장파 의원들은 평화통일을 지지했고 미군 철수를 주장했다.
궁지에 몰린 이승만 정권은 국회부의장 김약수 등이 미·소 양군이 철수하는 마당에 군사고문단을 남겨놓을 필요가 없다는 진언서를 6월 17일 유엔한국위원단에 보낸 것을 빌미로 소장파 맹장들을 체포했다. 5월에 이문원 등 세 명이 구속된 데 이어 6월 20일경부터 김약수와 노일환 등이 체포되어 모두 15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노일환과 이문원 등은 남로당에 포섭되어 미군 철수 등 반국가적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고, 다른 의원들은 이들에 동조했다는 것이었다.
같은 해 6월 19일부터는 헌병사령부에 국회프락치사건 특별수사본부가 설치되었고, 첫 공판은 1차 검거 후 7개월만인 1949년 11월 17일에 열렸으며, 14차에 걸친 공판 끝에 사실심리와 증거조사를 모두 끝냈다. 구형공판은 1950년 2월 10일 서울지방법원 대법정에서 열려 13명 전원에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최고 징역 12년형에서 최하 2년형까지 선고하였다. 선고공판은 같은 해 3월 14일 대법원 법정에서 열렸으며, 노일환 등에게 최고 징역 10년형을, 이구수 등에게는 최하 징역 3년형을 실형으로 선고하였으나 관련 피고인들이 1심 판결에 불복하여 항고하였으나, 2심 계류 중 6 ·25전쟁을 맞았다. 관련 의원들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전쟁의 와중에 출옥하여 사라졌다.
당시 미국은 이 사건을 다분히 정치적 사건으로 보고 더 이상 체포하지 않도록 압력을 가했다. 이 사건 이후 활발히 활동하던 국회는 바싹 움츠러들었다. 의회주의는 중대한 도전에 직면했다.
□ 단행본
- 브루스 커밍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 (서울 : 창비, 2001).
- 서중석.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서울 : 웅진, 2005).
- 송찬섭. 『농민이 난(亂)을 생각하다』. (서울 : 서해문집, 2004).
-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논쟁으로 본 한국사회 100년』. (서울 : 역사비평사, 2000).
- 장상환. 『해방전후사의 인식 2』. (서울 : 한길사, 1985).
- 한국전쟁학회. 『한국현대사의 재조명』. (서울 : 명인문화사, 2007).
- 한국정치연구회. 『키워드로 읽는 한국현대사1』. (서울 : 이매진, 2007).
□ 논 문
-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고려대학교 대학원-박사. (2005).
- 김종준. “한국전쟁기 서부경남지역 빨치산의 조직과 활동 : 1950년 10월 ~ 1951년 6월을 중심으로.” 동아대학교 대학원-석사. (2006).
- 이경. “남로당의 게릴라전 : 남북한 통합의 역사적 준거.” 경북대학교 대학원-박사. (2010).
- 장윤식. “제주 4.3사건 초기 무장대의 조직과 활동 :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의 분석.” 제주대학교 대학원-박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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