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YH 노동운동의 전개
3.김경숙열사
4.YH 무역 노동운동의 의의
5.현재상황
1) 흔들리는 반공 이데올로기
5.16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가 줄곧 내세운 국정의 지표는 반공과 경제성장이었다. 박정희는 반공을 명분으로 정치적 반대세력을 억압했고, 경제성장으로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내었다. 그런데 1970년대가 시작되면서 반공과 경제성장 양쪽에 위기가 닥치기 시작했다. 1960년대 말부터 동북아의 냉전구도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진행되기 시작한 중소간의 이념분쟁이 급기야 1969년에는 우수리강 일대에서 대규모 무력충돌로까지 비화했다. 한국전쟁에서 서로 총부리를 맞댔던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1972년 닉슨 미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거쳐 마침내 국교수립으로까지 이어졌다. 미국과 소련 사이에도 1969년부터 전략무기감축회담이 진행되어 세계는 냉전체제에서 데탕트체제로 이행하기 시작했다. 닉슨 미 대통령은 이른바 닉슨독트린이라는 새로운 외교방침을 발표했다. 그것은 분쟁지역에서의 미국의 과잉개입을 억제하고, 동맹국에 자국의 방위부담을 전가하는 것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1970~71년 주한미군 6만 명 중 2만 명을 철수하면서,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위한 남북대화를 강요하였다. 이런 속에서 1971년 9월 이산가족을 찾기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이 진행되었고, 1972년에는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을 내용으로 하는 7.4공동성명이 발표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 진전은 한국전쟁 이후 이 땅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과시하고 있던 반공이데올로기를 근저로부터 흔들었다. 그리고 또한 반공을 정권안보의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던 박정희 정권에 치명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2)경제위기와 함께 터져나오는 사회적 모순들
1963~ 69년 동안 고도성장을 거듭해 온 한국경제는 69년부터 심각한 불황국면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이 불황은 외자에 의존한 수출주도 경제의 구조적 모순이 나타난 것이었다. 무분별하게 들여온 차관은 상환기일이 다가오면서 원리금 상환에 대한 부담을 증가시켰고, 신규차관의 도입을 어렵게 했다. 여기에 미국이 한국산 경공업제품에 대해 수입규제를 강화하면서, 도산, 휴업, 은행관리로 넘어가는 기업이 대폭 증가했다. 1969년 5월 정부 발표에 의하면 차관업체 83개 등 정부투자기업의 45%가 부실기업이었다. 1972년 당시 외채는 국민총생산의 26.5%인 26억 달러나 되었다. 경제성장률은 1969년 13.8%에서 1971년 9.4%, 1972년 5.8%로 급격히 낮아졌다. 경제위기는 심각하여 1972년 8월 3일 정부가 3,500억원 규모의 기업사채를 강제로 동결하는 이른바 8.3조치라고 불리는 긴급재정처분명령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경제위기와 함께 각종 사회적 모순들이 일거에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분신자살했다. 전태일의 분신은 고도성장의 그늘 아래 열악한 작업 환경과 저임금에 시달려야 했던 노동자들의 분노의 절규였다. 71년 9월에는 한진상사 파월노동자들이 체불임금 지불을 요구하며 KAL빌딩에 방화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970년의 노동쟁의는 1,656건으로 전년의 무려 10배에 달했다. 1971년 8월에는 서울 변두리 판잣집에서 경기도 광주 황량한 벌판으로 무작정 내몰린 사람들이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다. 과중한 세금 부담에 불만을 품은 시장 상인들의 항의도 잇따랐다. 학생과 지식인들의 저항도 거셌다. 1971년 대학생에 대한 교련교육 실시 방침에 반발하여 전국의 대학생들이 시위에 나섰다. 1971년 4월 동아일보를 비롯한 전국 14개 언론기관에서 언론자유수호운동이 일어났고, 8월에는 대학 교수들이 대학자주화운동을 선언했다. 1971년 7월 7일에는 정권의 사법부 간섭에 반발하여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들이 전원 사표를 제출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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