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106년 라티움 아르피늄(지금의 이탈리아 아르피노)에서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로마와 그리스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은 그는 기원전 89년 폼페이우스 트라보(폼페이우스의 아버지) 밑에서 군복무를 했으며 기원전 81년 처음으로 법정에 등장해 큉쿠티우스를 변호했다. 기원전 80년 초에 그는 존속살인이라는 날조된 혐의로 기소된 섹스투스 로스키우스를 훌륭하게 변호해 법조계에서 명성을 확립했고, 기원전 75년에는 시칠리아 섬 서부에서 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기원전 66년에 그는 당시 막강한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그는 카툴루스와 유력한 옵티마테스(원로원의 보수파)에 맞서서, 폰투스 왕 미트라다테스를 토벌하기 위한 원정의 지휘권을 폼페이우스에게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와 폼페이우스의 밀접한 관계는 그후 그의 정치활동의 요체가 되었다. 그가 기원전 64년과 63년에 콘술로 선출된 것은 그의 경쟁자인 카틸리나이 혁명사상을 두려워한 옵티마테스가 그를 밀어준 덕분이었다.
콘술에 선출된 뒤 첫 번째 연설에서 그는 로마를 떠나 있던 폼페이우스를 위해 세르빌리우스 룰루스의 농업법안을 반대했다. 그러나 그의 주요 관심사는 카틸리나의 반란 음모를 폭로하는 것이었다. 기원전 64년의 콘술 선거에서 키케로에게 패한 카틸리나는 63년에도 선거에 출마했다. 카틸리나는 선거에서 다시 패배하자 이탈리아에서 무장 반란을 일으키고, 로마에 불을 지르려는 음모를 꾸몄다. 키케로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이 위험을 납득시키느라 애를 먹었지만 10월 22일 마침내 계엄령 선포와 유사한 '최후의 포고령'이 원로원을 통과했다.

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