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박용래의 생애
박용래는 1925년 충남 논산군 강경읍 본정리에서 박원태와 김정자의 3녀 1남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부친은 인근 동네에서 한학과 한시로 이름을 떨쳤던 유생 출신이다. 집안의 가세가 기울고 허약한 체질 때문에 바로 위 홍래 누님의 등에 업혀 자랐다. 1939년 강경 상업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이 곳 출신들이 1970년대 까지 상업, 금융계의 요직을 두루 맡을 정도로 일제 시대 명문 중 하나였다. 그 학교에서 박용래는 학업과 품행이 모범이었고 미술반장으로서 미술에 특기를 보였다. 한편, 1940년 바로 위 누이 홍래가 초산의 산고로 사망하였다. 이 충격 때문에 이 충격 때문에 삶의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고 내성적이고 우울한 성격으로 돌변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춘기 소년기에 겪게 된 이 혈육과의 사별의 기억은 그가 후에 맞이하게 된 간난의 시대 환경 속에서 겪게 되는 좌절과 회의와 함께 시인 박용래의 시적 정서와 상상력의 토대를 이루게 된다.
1943년 강경상업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조선은행에서 근무하였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서정적인 기질을 타고 났으며 술을 사랑하고 즐기는 습관 탓에 은행도 그만두고 여기저기 중등학교 교사 1948년(24세)에 호서중학교(대전동중학교의 전신) 교사로 부임 4년 뒤 사임, 1954년(30세)에 중앙철도고등기술학교(현 계룡기계공고의 전신) 국어과 교사로 취임 3년 뒤 사임, 1960년(36세)에 한밭중학교 강사로 취임 3개월 뒤 사임, 1961년(37세)에 송악중학교 교사로 부임 1년도 안되어 사임.(김학동외8(2005:232~234))
로 지내다가 1965년(41세)이후에는 직장 없이 지낸다. 이 때문에 자신의 아내 이태준은 간호사와 조산원 생활로 뒷받침했다고 한다.
1947(23세)에 대전 지방 문인인 정훈, 이재복, 박희선, 하유상, 원영한과 함께 ‘동백시인회’를 결성하고『동백』을 간행한다. 이후 1956년(32세)에 박두진의 추천으로「가을의 노래」,「황토길」,「땅」을 발표하면서 정식으로 시단에 등단한다. 그후 그가 적극적으로 자신을 표출해내기 시작한 것은 첫 시집『싸락눈』(삼애사, 1969)에서 부터이다. 이후『강아지풀』(민음사, 1975),『백발의 꽃대궁』(문학예술사, 1980)등의 시집을 간행했으며, 박용래가 사망한 이후에는 간행 시집에 포함되지 않은 시들을 엮어『먼 바다』(창작과 비평사, 1984)가 간행되었다.
박용래는 목월 선생에 대한 애정과 존경이 남달랐으며, 그의 앞에서 그칠 줄 모르게 소주를 마시며 계속 눈물을 흘리며 목월 선생의 작품을 암송하고 넋두리를 하였다고 한다. 목월 선생에 대한 마음은 수필「물쑥」이나 시「해시계」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박용래를 가리켜 ‘눈물의 시인’이라고들 한다. 그는 사람을 만나면 술잔을 기울이고 또 눈물을 쏟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를 만난 사람들은 그의 정다운 속삭임과 뜨거운 눈물 때문에 그를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1980년(56세) 심장마비로 사망한 이후에 1984년에는 대전시 보문산 사정공원에 시비가 건립되어 비면에는「저녁눈」전문이 새겨졌고 1997년에는 논산시 논산공설운동장에 시비가 새워지고「겨울밤」전문이 새겨졌다.
2. 작품 경향과 문학적 특징
박용래는 첫 시집『싸락눈』에서 사후 간행된『먼 바다』까지 160편의 시를 남겼는데, 약 30년간의 활동에 비해 그 수가 매우 적은 편이다. 그의 시들은 50년대 전통 서정시의 계보를 잇고 있지만, 그만의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
내용적인 면에서는 슬픔의 한으로 집약되는 김소월이나 슬픔을 노래하면서도 생생한 기운을 살린 김영랑 또는 불교적 형이상을 저변에 깔고 있는 한용운의 이별의 시와는 달리, 그 자신을 대상으로 하여 그가 느낀 삶의 체험들을 삭히고 가라앉혀 나름의 시적 언어로 표현하여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형식적인 면에서는 김소월의 경우처럼 규칙화된 율격적 분할의 규격성에 따르지도 않고 한용운의 경우처럼 연속적인 유창한 일상언어의 리듬감의 뒷받침을 받고 있는 것도 아니다. 박용래 시는 토막난 시어의 나열에 의한 연속감과 단절감 사이의 미묘한 여백과 여운을 특징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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