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 가 소 개 】
제갈량(諸葛亮: 181-234)은 자(字)가 공명(孔明)으로 낭야군(琅郡) 양도현(陽都縣: 지금의 산동성 기수현(沂水縣) 남쪽 사람이었다. 일찍이 은거하여 전원생활을 하였으나 후에 유비를 도와 손권과 연합해서 적벽대전에서 조조를 물리치고 蜀漢을 세운다. 魏吳나라와 함께 천하를 삼분하고 승상으로 임명된다. 유비가 임종 시 후왕을 잘 보좌하도록 유언을 남기니, 한 왕실을 적극 도모하여서 여섯 차례나 북벌을 감행하였으나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병사로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인물로 자주 묘사되는 제갈량은 중국의 많은 연극과 소설에서 즐겨 다루어진 인물이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당시 세력이 미약했던 유비(劉備)가 제갈량의 지혜가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그가 은거하고 있던 초막으로 3번씩이나 찾아가 자신을 도와달라고 청탁했다고 하는데, 이것을 삼고초려(三顧草廬)라고 한다. 그는 유비가 대규모 군대를 조직하고 촉한을 창건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유비는 그를 매우 신임하여 임종시 자기 아들에게 그의 충고에 꼭 따를 것을 당부했다. 뿐만 아니라 유비는 자기의 아들이 무능할 경우 제갈량이 직접 제위에 오르게 하도록 유언했다. 기계제작과 수리에 능했던 제갈량은 한꺼번에 여러 대의 화살이 발사되는 활을 발명했고 일련의 전술법인 팔진법(八陣法)을 완성했다고 한다. 14세기에 나온 장회(章回) 역사소설인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에서 그는 주요등장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이 소설에서 바람을 마음대로 일으키며 예언 능력을 지닌 인물로 그려져 있다. 1724년 유교의 성인으로 추존되었다.
【 작 품 배 경 】
表는 옛날에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일종의 문체이다. 《出師表》는 최초로 《三國志 蜀志 諸葛亮傳》에 보이는데, 제갈량이 中原을 통일하라는 劉備의 유지를 실현하기 위해 建興(後主 유선(劉禪)의 연호) 5년(227) 曹魏 정벌에 나서면서 後主에게 올린 글이다.
당시 蜀은 맹장 關羽와 張飛가 불시에 죽음을 당하고 중요한 근거지가 적에 함락되자 유비로 하여금 일대 타격과 분노를 금할 수 없게 있다. 이때 유비는 공명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東征에 나섰다가 대패하고 돌아와 병들어 눕게 되자 章武 3年(223) 4월 임종 전에 제갈량과 아들 유선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 그대의 재능은 曹丕보다 10배는 월등하여 반드시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으니, 끝내 대 업을 이룩해 주오.” 君才十倍曹丕, 必能安國, 終建大業.
“ 너는 승상과 더불어 종사하되, 승상 섬기기를 어버이처럼 하라.” 汝與丞相從事, 事之如父.
그러나 공명은 죽기를 각오하고 後主를 섬길 것을 맹세했다. 유비가 죽고 나서 태자가 17세의 나이로 즉위했는데, 그의 지능은 보통 이하였다. 그래서 공명은 유비가 임종시에 남긴 비통한 당부를 생각하며 유선을 위해 더욱 분골쇄신할 것을 맹세했다.
삼국 시대, 촉(蜀)나라의 유비가 죽자 남방 이족(이族)의 우두머리인 맹획(孟獲)은 이를 틈타 군대를 동원하여 촉나라에 반항하였다. 이즈음 유비의 아들 선(禪)은 촉나라의 후주(后主) 자리를 물려받고, 제갈량은 계속 승상의 일을 맡아보며 무향후(武鄕侯)에 봉하여져 촉나라의 군사 지휘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유비가 죽은 후 촉의 운명은 날로 쇠약해져 그야말로 존망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이와 같이 위급한 시기에 처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난국을 타개하고 또 나라를 위해 한 몸 바치겠다는 것이 공명의 진실한 심정이었다.
제갈량은 안정적인 국면을 유지하기 위하여,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힘을 모았다. 몇 년이 지나자, 촉나라는 이전처럼 국력을 회복하고, 충분한 식량도 비축하게 되었다. 서기 225년, 제갈량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남쪽 원정에 나서 맹획을 일곱 차례 붙잡았다가 일곱 차례 놓아주었는데, 맹획은 진심으로 감복하여 촉나라에 귀순하였다.

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