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 관련사례 - 5학년 - 2 절제하는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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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아리스토텔레스 - 관련사례 - 5학년 - 2 절제하는 생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Ⅰ. 아리스토텔레스의 덕론
1.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일종의 좋은 행위하고 정의한다. 행복한 사람은 덕을 가진 사람이며, 그것에 따라 반드시 행동하고 또 잘 행동하는 사람이다. 심리적 만족이 행복의 중요한 척도가 되는 현대의 의미와는 크게 다른 것이다. 또한 우리가 달성할 수 있는 것 가운데 최고의 것을 행복이라고 정의한다.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론을 믿지 않았다.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오직 하나의 자연적인 세계밖에 없으며, 이데아든 감각적 사물이든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의 세계 속에 같이 있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는 달리 인간이 죽으면 그것으로 우리의 삶도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또는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그 모든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일일 뿐이라고 말한다. 참으로 좋은 것 그리고 참으로 선한 것은 바로 지금 여기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실현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체로 사람들이 무엇을 하든 간에 그것은 좋은 것을 위해서 하는 것일 것이며, 또는 최소한 그들이 생각하는 것이 목표로 삼을 만한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우리는 동의할 수 있다. 가장 본질적인 것은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할 때, 그가 그것을 하고 있는 이유에 대한 정답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밀을 자라게 하기위해 들을 개간하고, 밀알을 얻기 위해 밀을 자라게 하며, 밀가루를 얻기 위해 밀알을 찧고, 빵을 만들기 위해 밀가루를 구우며, 먹기 위해 빵을 만든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사슬이 그 자체로 바람직한 목적이 되는 마지막 고리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행위가 어떤 목적으로 행해지는가? 모든 인간의 행동은 욕망에서 시작된다. 욕망은 행위자에 있어서의 유의적인 결정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선으로서 욕망이 되는 많은 것들 사이의 문제이다. 대체로 이러한 것들에는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순전히 도구적인 것이며 결과 때문에 욕망될 뿐, 그것 자체 때문에 욕망되는 것이 아닌 것이 있다. 둘째, 다른 결과가 없을 지라도 욕망되는 것이 있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은 다른 선의 획득에 공헌하기 때문에 욕망되는 것이다. 셋째, 궁극적 선은 오직 그것 자신의 목적 때문에 욕망되는 것으로서 결코 다른 것을 위해 욕망되는 것이 아니다. 이들 세 종류 중에서 마지막 것의 그 자체로서 욕망되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이다. 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 자체를 위하여 소망되는 것, 바로 인생의 궁극목적인 최고선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따라서 최고선이란 첫째로 궁극성, 즉 그것이 다른 무엇의 수단이 될 수 없다는 뜻으로서 자기 목적성이다. 둘째로 완전성, 즉 그 이상 아무것도 보탤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서의 자족성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의 성질을 갖춘 것은 바로 행복일 것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정한다.
행복이란 다른 무엇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는 것이며, 또 그 이상 다른 것을 보탤 필요 없이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최고선으로서의 행복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다. 궁핍한 사람은 부를, 환자는 치유를, 배고픈 자는 음식을, 외롭고 고독한 사람은 기쁨과 즐거움을 행복이라 여길 것이다. 이것은 행복을 충족의 입장에서 본 견해이다. 이것들은 행복의 상대적 요소이기 때문에 행복의 정의를 규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서 다시 문제에 봉착하고 만다. 그는 단지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 행복이라고만 하였지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제까지 단언해왔던 것이 공허한 메아리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선이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실현 불가능한 선을 참된 선이라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인간에게 유익을 가져다주지 않는 선을 선이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선이 참된 의미에서 삶의 완성과 온전함에 관계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모든 면에서 좋은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윤리학의 궁극적인 관심은 좁은 의미의 선이 아니라 포괄적인 의미의 선이다. 일면적인 선한 삶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좋은 삶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추구한 이상적 삶이었던 것이다.
좋음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분히 주관적인 정의를 내리고 있다. 무엇이 좋은 것인가라는 물음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각자가 추구하고 각자가 욕구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선이나 좋은 것을 말하든지 간에, 만약 그것이 우리가 바랄 만하지 않고 우리가 동의할 만하지도 않은 것이라면, 선이든 좋은 것이든 모든 것은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소외된 가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선은 우리의 자발적 의욕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처럼 우리가 추구하는 좋은 것들은 거의 대다수는 목적인 동시에 수단이다. 또 다른 목적을 위해 도구적으로 쓰이지 못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쓸모없는 일일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좋은 것은 무엇인가를 위해 쓸모 있는 것이기 때문에 추구되는 것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삶의 총체적 의미는 모든 사람들이 축하는 삶의 궁극목적인 행복이다. 왜냐하면 행복을 이야기 할 때 행복자체로서 추구되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그 자체로서 좋은 것이고 이런 까닭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삶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