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직(李漢稷) - 생애 및 활동사항 & 초기시 - 모더니스트 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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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한직(李漢稷) - 생애 및 활동사항 & 초기시 - 모더니스트 경향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이한직(李漢稷)
1. 생애 및 활동사항
이한직(호는 목남(木南), 율아당(栗雅堂))은 1921년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아현리 47번지에서 아버지 이진호와 어머니 김숙경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이진호는 구한말 평안도 관찰사를 지내고 일제 강점기인 1924년에는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조선 총독부 학무국장을 지냈다. 그리고 중추원 참의, 중추원 부의장, 중추원 고문을 거쳐 귀족원 의원에까지 일제 강점기 국권상실의 상황에서 조선인으로서는 드물게 고위직을 두루 거친 친일 인사였다.
이한직의 아버지는 아들을 일본인 학교인 남산 심상소학교(현 서울 남산초등학교)와 경성중학(현 서울 고등학교)에 다니게 했다. 이 두 학교는 일본인들의 자제를 위해 세운 학교로 식민지 조선을 이끌어 나갈 지도자를 양성하는 성격이 강한 교육기관이었으며 다분히 귀족풍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 이한직은 일본어를 모국어보다 체계적으로 배웠을 것이고 일본어가 모국어인 한국어보다 읽고 쓰기에 더 편리했을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가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지를 통해 시인이 되었다는 것은 한글에 대한 애착을 가졌다는 것과 또 이한직이 나름대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근거가 된다.
1939년 이한직은 경성 중학을 졸업하고 일본의 모 대학 예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같은 해애 이한직은 「문장」지에 「風葬(풍장)」, 「北極圈(북극권)」(1939, 5), 「羈旅抄(기려초)」(1939, 6), 「駱駝(낙타)」, 「溫室(온실)」(1939, 8) 등을 응모하여 정지용으로부터 모두 3회 추천을 완료하고 만 18살의 나이로 한국 문단에 정식으로 등장했다. 1939년 8월 문장지에는 이한직의 당선 소감인 「翰(한)」이 게재되어 있다. 이 글의 마지막 부분 ‘小歷’에서 이한직은 ‘今春不第某大學豫科 以招師父之 撻楚 今己嘗膽數朔 必期捲土重來’라고 적고 있다. 이것에 근거하면 이한직의 등단시기는 게이오 대학 입학전인 1939년이고 대학에 입학한 해는 1939년 이후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한직은 일본 사학의 명문 게이오의숙대학 법학부에 입학하였다가 3학년 재학 중이던 1943년 태평양전쟁 발발로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1945년 광복 후 귀국하였다. 1939년 등단 후 떠난 일본유학 때부터 광복된 1945년까지 이한직은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이 시기는 이한직의 문필 활동 공백기라고 할 수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한직의 시작 활동은 1939년 등단 후 1949년「놉새가 불면」을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가 귀국 후인 1947년 「雪衢(설구)」를 발표하면서 다시 시작된다.
광복과 더불어 20대 중반기에 접어든 이한직은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진 한국 문단에서 우익인 민족주의 진영에 서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여 서정주,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등과 함께 詩部의 임원을 맡는 한편 외국 문학부의 임원도 겸할 정도로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특히 이한직은 외국문학을 소개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광복 후부터 1950년대까지 매우 활발한 시작활동을 하였는데 그의 시 전31편 중 17편이 이 시기에 쓰여졌다.
1959년 625 동란 중 이한직은 대전에서 서정주, 조지훈, 박목월, 구상, 김윤성 등과 함께 「文總救國隊」란 종군 문인단을 조직하여 국군 정훈국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1951년 14 후퇴 직후 대구에서 결성된 「공군 종군문인단(별칭 창공구락부)」에 참여하였으나 공군 종군문인단으로 발표한 것으로 보이는 작품으로 「공군의 노래」외에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한직은 1960년 419 혁명과 관련해 「鎭魂(진혼)의 노래」, 「激流(격류)에 부친다-간밤 꿈 이야기나 한자리」, 「瞋(진에)의 불꽃을」, 「四月의 旗는」, 「깨끗한 손을 가진 분이 계시거든」등 모두 5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이 해 이한직은 돌연 주일대표부 문정관으로 일본으로 갔다. 그 곳에서 그는 516 군사 쿠데타를 맞아 이철승, 양일동 등 일본에 체류하던 정치인들과 함께 군사쿠데타를 반대하는 성명을 내 입국이 금지되었고 이것이 빌미가 되어 1961년 주일 문정관에서도 물러났다. 이후 이한직은 일본에서 문필 생활과는 거리가 먼 전자공업에 종사하였다. 1976년 췌장암 및 암성 복막염으로 도쿄 도 네리마구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생전에 시집을 내지 않았다가 1976년 사후에 동생과 주위 문우들이 문리사에서 「이한직 시집」을 발행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유일한 시집이 되었다.
2. 초기시 - 모더니스트 경향
이한직의 시는 감정을 직접 드러내기보다 이미지를 통해 상징화되고 이 상징들은 다시 내면세계의 모습들과 연결되는 것이다. 또한, 이한직의 시는 자연성을 추구하며 그 형식적인 표현 기법에서는 모더니즘의 기법을 도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