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대 산문의 흐름
중국의 의론문은 전국 말에서 진나라에 이르는 시기에, 특히 상소문을 중심으로 완성된다. 한비(韓非, B.C. 208-B.C. 233)가 진왕(秦王)에게 올린 「한비자(韓非子)」 권1 존한(存韓) 제2, 이사(李斯, B.C. 284?-B.C.208?)의 「간축객서(諫逐客書) BC 237년 진(秦)의 치수(治水)사업을 맡고 있던 정국(鄭國)이 한(韓)에서 파견한 첩자임이 밝혀져, 진왕은 종실과 대신의 의견을 받아들여 진에 재직하고 있는 모든 외국 국적의 관리들을 추방하도록 명을 내렸다. 이사도 초(楚)의 사람으로서 추방되는 입장에 처하게 되었으며, 함양(咸陽)을 떠나면서 진왕에게 간언하기 위해 쓴 서신이 「간축객서」이다.
」등이 그 대표적인 글이다. 그 밖에 이사가 태산(泰山) 낭야대(琅臺) 지부(之)등 여러 곳에 비석에 새긴 글도 남기고 있는 것을 보면 한자의 자체가 소전(小篆)으로 정비된 이후 문장의 기능도 한층 더 발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진말(秦末)에 오랜 기간의 전쟁을 거쳐 유방(劉邦)이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였는데, 그가 바로 한 고조(漢 高祖)이다. 당시 사회의 안정, 경제의 발전으로 이른바‘문경지치(文景之治)’가 출현하였고, 이후 한 무제(B.C.156-B.C.87)는 유학을 받아들여 나라의 정치 이념으로 삼고 사상적 문화적 통일정책을 폈다. 무제는 유학을 장려하기 위해 오경박사(五經博士)와 제자원을 두었으나, 전제군주 아래의 학문은 결국 당시의 정치원리를 꾸며주는 역할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에 의해 한대의 산문은 상소문을 중심으로 한 정론문(政論文)과 전국시대의 역사적 산문을 계승한 사전문(史傳文), 철리문(哲理文)으로 발달한다.
2. 서한 산문
2-1. 서한의 정론문(政論文)
→정론문은 주로 왕에게 자기의 견해와 정책을 건의하고 설득하는 상소문의 성격을 지닌다
2-1-(1) 과진론 (過秦論)
가의(賈誼, B.C.201-B.C.169)의 『과진론(過秦論)』은 진나라 멸망의 원인이 내부 모순에 있었음을 날카롭고 거침없는 논조로 설파한 명문으로 고문체의 모범이 된다. 원래 가의의 문집에 있었으나 지금은 전해 오지 않는다. 현재 통용되는 『가의집(賈誼集)』은 『신서(新書)』10권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후세 사람이 편집한 것이다.
2-1-(2) 논귀속소 (論貴粟疏)

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