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론 김기택 시인 시집 바늘구멍 속의 폭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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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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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현대시론-
김기택 시인 시집 ‘바늘구멍 속의 폭풍’
누가 시를 추상적이다 라고 했는가,
김기택 시인의 시에서 느낀 시는 선명한 모양과 뚜렷한 색체를 띄고 있었다. 이 말도 상당히 추상적인데, 뭐랄까 그의 시는 너무도 섬세하고 구체적이다. 고유의 윤곽을 가진, 육체를 가진 말이랄까? 그를 알기 전 내게 시는 형용할 수 없는 여느 감정들을 담는 그릇- 말도 아니고 목소리도 아닌, 순수라고 표현되는 것이었다. 그 순수가 보이지 않는 것이라면 그의 시는 눈에 보이는 상처며, 닭살이고 주름살이다. 때문에 졸음, 뱀, 멸치, 파리, 병, 무좀 등과 같이 일상의 모든 것들이 시의 재료가 되고 주제가 된다. 그래서 참 좋다. 난해하지 않아 좋고, 사물을 이렇게도 바라볼 수 있구나 란 발견에 좋다. 지난날 형식주의자들의 ‘낯설게하기’가 평소보다 세밀하게 관찰하고 묘사한 부분에서 나타날 수도 있음에 놀랍고 동시에 반갑다.
시집에 실린 시 하나하나가 기발하고 색달랐는데, ‘바늘구멍 속의 폭풍’은 바늘구멍만치 작아진 숨구멍과 그 숨 한번을 위해 그 안에서 폭풍같이 휘몰아치는 고통들. 그 폭풍을 야기한 자가 자신임을 알기에 그저 더 웅크릴 수밖에 없는 삶을 그려내고 있다. ‘고요한 너무나도 고요한’은 고요와 소음의 공존. 둘 중 하나만 존재한다면 그것을 고요하다 느끼지 못할 것이고 그것을 시끄럽다 느끼지 못할 것이다. 흑 과 백, 빛과 그림자, 악마와 천사 등 상극을 이루는 것들은 서로 공존하기 때문에 상극인가보다.
‘먼지의 음악’은 각자의 자리에서 살며시 나와 공기라는 선율에서 서로 비벼대며 소리를 낸다는 먼지들을 비유한다. 실로 귀엽고 앙증맞은 발상이 아닌가? 환갑을 앞둔 기점에서 이리도 순수한 생각을 할 수 있다니 놀랍다. 동시에 만화 ‘이웃집 토토로’에 나오는 먼지 ‘마쿠로쿠로스케’가 떠오른 건 나뿐일까? 오랫동안 비워둔 집 문을 막 열었을 때 날리는 집먼지들이 실은 살아 움직이며 그들끼리 뭉치기도하고 소리도 낸다는 상상력. 만화에선 시골에만 살지만, 김기택 시인의 시 속 먼지들은 도시의 인간들과 공생하고 있다. 문득 질병의 원인으로만 여기며,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진공청소기로 밀어버린 그 먼지들에게 나도 모르게 미안해졌다.
‘개밥그릇하나’ 또한 섬세한 관찰력이 돋보인다. 적이 된 밥그릇에 돌진하고, 밥그릇을 물어 흔들고 할퀴고 차는 행위들을 이렇게 표현하구나. ‘저 개가 왜 지랄이지, 배고푼가’라고 넘어갈 일상인데, 작가에 눈에는 이마저도 놀이가 되고 시가 된다.
‘소2, 소3’은 인간의 의해, 인간을 위해 한 덩이의 고기가 되고 가죽이 되어버리는 소가 육체를 잃은 넋은 바람이 되어 그 냄새를, 육체를, 소리를 찾아 헤맨다 생각하니 안쓰럽고 미안했다. 그러나 이 마음은 잠시뿐 ‘먹자골목 지나며’의 상황에서 우린 그저 굶주린 배 속을 채우고자 그 달콤한 냄새로 미안한, 안쓰러운 죽음의 냄새를 포장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죽음 앞에 떨던 불안과 일 순간의 공포로 점철된 그 고기들을 너무 맛있다며, ‘이집 맛 집이다’라며 가고, 또 가고 또 가며 동물들의 희생을 강요한다.
내가 집은 젓가락에 매달린 멸치, 지느러미 흔들며 물결 사이사이를 향유하던 생물이었던 ‘멸치’들은 내가 젓가락질만 하지 않았어도, 엄마가 건어물집에서 사오지만 않았어도, 그물에 걸리지만 않았어도 지금도 드넓은 바다를 향유하며 자유를 만끽했을 멸치들인 것이다. ‘나무’또한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나무, 그 나무의 나이테가 그려내는 삶의 흔적이 하나의 상품, 목재가 되어 이게 더 고풍스럽다느니, 클래식하다느니 하는 인간들의 평가에 무분별하게 벌채되고 가공된 것이란 생각지도 못한 생각을 하게했다. ‘새’의 새들은 새 장에 머리를 부딪치고 날개가 상하고 나서야 그곳이 집이 아닌 장이란 걸 인식하는지, 창살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전과 같은데 자기 앞을 가로 막는 그 창살의 존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나보다. 이해하질 못하니 인식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걷는다. 창살이 열려도 그곳은 여전히 창살이라는양 그저 먹이를 향해 걸을 뿐이다.
이런 나 또한 시로써 대할 땐, 감상으로 대할 땐 소, 멸치, 새 등 모든 말 못하는 짐승들이 ‘불쌍하다 불쌍하다’ 생각하지만, 난 오늘도 나무로 된 의자에 앉아 소고기를 썰고, 멸치를 씹으며 새장의 새들을 관찰하고 있다. 내가 살기위해서 다른 것들의 희생을 묵인하고 있다. 아니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참 모순이다. 그러나 ‘사진 속의 한 아프리카 아이 1, 2’를 보면 앞서 말 못하는 짐승들에게 한 없이 잔인한, 매정한 인간들이라는 점 이상으로 같은 인간들에게조차도 그 잔혹함, 그 이기심을 드러내고 있다. 너무도 유명한 두 사진 앞에서, 같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인데, 왜 누구는 너무 많이 먹어 수술을 받는데, 누구는 쌀 한 톨 먹지 못해 굶주려야하는가, 죽어가야만 하는가, 그 어린아이는 그저 가난한 나라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굶어야하고 죽어가야만 하는가, 가슴이 너무 아프다. 지구촌시대란 말처럼 허울뿐인 말도 없을 것이다. 세상은 한 없이 빨라지고 가까워진다지만 인종 간, 동포 간 차별과 격차가 좁혀지지 않는 이상 누군가는 계속 배 터져 죽을 것이고 누군가는 계속 배곯다 죽을 것이다.
술에 취해야만 말을 하고 소리를 지르는 ‘주정뱅이’나 주변의 눈치를 피해 회사로, 업무로 도피하는 ‘김과장’의 모습에서 차마 못했던 말들과 참아낸 고통은 술기운을 빌려 토사물로 흐르며 비틀거리는 다리만큼 비틀거리는 길을 그저 죽은 사람처럼, 타인에 의해서만이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며 확신없이, 기대없이 걷고만 있는 모습에 슬픈 현실, 슬픈 미래, 그러나 변함없을 오늘을 본다. 불안한 오늘과 캄캄한 미래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결코 되고싶지 않은 ‘실직자’는 실직이란 말 앞에 육체보다 먼저 무너져버린 영혼-마음은 늘 가던 길을 헤매고 고꾸라지지만 않기 위해 발을 내딛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