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의 시조-
1. 머리말
황진이(黃眞伊)는 명기이면서 국문학사, 특히 시조에 관련하여 비중 높은 작가다. 작년에 높은 인기를 얻으며 종영했던 드라마 에 이어 얼마 전에는 유명배우가 주연을 맡은 라는 영화도 개봉이 되었다. 이런 영상매체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학 장르에서의 황진이의 출연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요새 들어 황진이의 인기가 더욱 높아진 건 사실이지만 꽤 오래전부터 황진이는 빠지지 않고 은근하게 거론이 되어 왔던 인물이다. 필자는 이번 작품론에서 황진이의 작품을 통하여 그의 작품세계를 알아보고, 지금까지 연구가 된 것들을 검토하여 필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2. 황진이에 대하여-
16세기 중엽 송도의 이름난 창기 황진이는 여자 가운데 호걸로 기개있고 호방하고 용감한 사람이다. 그녀는 은거하는 학문에 정통하다는 화담 서경덕을 시험해 보나, 그는 흔들리지 않는다. 천하의 명산 금강산 청유(淸遊)에 동행하는 자 이생원과 함께 서로 벗하며 선랑(仙郞)을 받들고 선유(仙遊)해 본다. 또 선전관 이사종의 절창을 듣고 친근한 정을 나누며, 6년만 함께 살자고 한다. 이들은 서로가 3년씩 비용을 각자의 집에서 마련하여 똑같은 방식으로 분담하며 생활하다가 약속대로 작별한다. 이후 진이가 병들고 죽으면서 말한 그녀의 유언은 죽은 후 큰 길가에 묻어 달라는 내용이다. 후에 임제가 평안도 감사가 되자 송도에 들러 글을 지어묘제를 지어 주었다 이월영 역주(2001), 『어유야담 - 보유 편』, 한국문화사, pp.68~71 : 임금복(2004), 「새로 쓴 황진이 연구」, 『돈암어문학』제17집, 돈암어문학회 p.269에서 재인용)
는 내용이 문헌에 전한다.
살펴본 바와 같이 황진이의 연보나 문집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생몰연대조차 알 수 없다. 출생신분에 관해서도 양반의 서녀라는 견해와 맹인의 딸이라는 견해 등 다양한데 서민층, 그것도 천한 가문의 사생아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여성이 남성을 향해 품게 되는 연정을 읊었다고 알려진 그녀의 시에는 ‘山은 녯산이로되 물은 녯물이 안이로다’와 같은,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라든가 ‘秋風에 지 닙 소릐야 낸들 어이 리오’ 같은 인간 존재가 갖는 근원적인 고독감 내지는 단절감을 표현하는 깊은 철학을 나타낸 면도 볼 수 있다. 그녀는 서화담을 매우 존경하고 그와 정신적 교분을 나누었는데 두 사람의 이러한 정신세계는 작품을 비교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는 구속을 싫어하고 적극적이고 활달한 성격으로 자신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여 서화담, 박연폭포와 함께 자신을 송도삼절이라 말하였다 한다. 김연옥(2002), 「황진이 시조의 멋과 풍류」, 『새국어교육』제63집, 한국국어교육학회, pp.11~13
3. 작품개관 및 기존의 연구
3.1 황진이 작품의 수(數)에 대한 연구.
조동일은 그의 저서에서 “황진이의 시조는 작가가 엇갈려서 정확하게 헤아릴 수는 없으나 대략 여덟 수쯤 되는데, 이별한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조동일(1994), 『한국문학통사』권2, 지식문화사, p.359
” 라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보통 일반적으로 황진이의 시조는 여섯 수가 전해진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여덟 수’란 역대시조전서 의 588, 894, 1009, 1441, 1965, 2598, 2858, 2865번의 시조 작품들을 가리킨다. 임주탁(2006), 「이야기 문맥을 고려한 황진이 시조의 새로운 해석」, 『우리말글』제38집, 우리말글학회, p.202
이 가운데 황진이의 것이라고 단정짓기에는 논란이 많은 1009번과 2598번, 그리고 1965번의 시조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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