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인 고선지 장군과 이정기 절도사의 활약상 고선지 이정기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온 역사에서 고선지 장군과 절도사 이정기는 주류로 취급되지 않아 왔다. 그들은 고구려가 멸망한 뒤 타국에서 고국인 고구려의 위상을 드높이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들이었다. 비슷한 연대에 살았고 한민족의 위상을 세계에 높이 알렸던 그들에 대해 알아보자.
고선지 장군( ? ~755)
고선지는 고구려 출신의 당나라 장수로서 뛰어난 지휘력과 통솔력을 지닌 장군이었다.
《신구당서》열전의 고선지조를 보면 본래 고구려인이었던 고선지의 아버지는 당라라에서 사진교장(四鎭校將)이란 벼슬을 지낸 고사계(高舍)였다. 성이 국성(國姓)인 고씨인 것은 그의 집안이 고구려의 귀족이었음을 뜻한다.
20세 때 아버지를 따라 당나라 안서로 가서 음보로 유격장군에 등용되었는데 말을 잘타고 활을 잘 쏘아 20세에 장군이 되었다. 뛰어난 무술솜씨로 안서 절도사의 신임을 얻어 언기진 수사가 되었다가, 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텐산산맥 서부의 달해부를 정벌한 공으로 안서부 도호로 승진했다가 다시 사진도지병마사(四鎭都知兵馬使)로 승격했다.
당나라에게 고구려가 망하게 되자 당나라의 행영절도사(行營節度使)에 발탁되어 토번족의 정벌 임무를 띠고 1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오식닉국을 거쳐 파미르고원을 넘어 토번족의 군사기지인 연운보(連雲堡)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계속 진격하여 험난하기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힌두쿠시준령을 넘어서 소발율국의 수도 아노월성을 점령하고, 사라센제국과의 유일한 교통로인 교량을 파괴하여 그들의 제휴를 단절하였다. 이 1차 원정에서 불름(佛: 동로마), 대식(大食: 아라비아) 제호(諸胡)의 72개국의 항복을 받고 사라센제국의 동진을 저지한 공으로, 귀국하여 홍로경어사중승(鴻卿御史中丞)에 오르고 이어서 특진겸좌금오대장군동정원(特進兼左金吾大將軍同正員)이 되었다. 이것이 747년의 일이었다.
750년에 고선지는 2차원정을 단행해 사라센제국과 동맹을 맺으려는 석국을 토벌하고 국왕을 잡아 장안(長安)으로 호송한 공으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되었다.
그러나 장안의 문신들이 포로가 된 석국왕을 참살하였기 때문에 이듬해 서역 각국과 사라센이 분기하여 연합군을 편성하여 탈라스의 대평원으로 쳐들어오자, 이를 막기 위하여 다시 7만의 정벌군을 편성하여 제3차원정에 출전하였다.
하지만 당나라와 동맹을 가장한 카를루크가 배후에서 공격을 하여 오히려 패배하고 후퇴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탈라스전투이다. 제2차의 탈라스원정에서 돌아오자, 당나라 현종은 그를 다시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에 전임시키고 우우임군 대장군(右羽林軍 大將軍)에 임명하였다. 755년에는 밀운군공(密雲郡公)의 봉작을 받았다.
이해 11월에 안녹산의 반란이 일어나자 고선지는 군사 10만을 이끌고 낙양서쪽의 삼문협을 지키려 했으나 봉상청이 이끄는 선발군이 이미 패배했음을 알고, 이 곳을 지키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군수품과 양곡을 사졸들에게 나누어준 후 남는 것은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삼문협 서쪽의 요충지인 동관으로 후퇴하여 일전의 의지를 다졌다. 그런데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있던 감군 변영성(邊令誠)이 현종에게 과장하여 밀고함으로써 진중에서 참형되었다. 영국의 동양학자 스타인(M.A.Stein)이 “일찍이 유렵의 어느 유능한 사령관보다 탁월한 전략과 통솔력의 소유자였다.”고 격찬한 고선지는 이처럼 무고하게 생을 마감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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