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클림트’를 읽고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구스타프 클림트는 언제나 스스로 목표를 새롭게 설정했다. 화가의 자유는 그에게 빼앗길 수 없는, 가장 큰 갈망이었다.
클림트의 작품세계를 함축적으로 말해주는 구절이다. 그가 살던 시대는 남성성, 자유주의 등 기존의 확고한 신념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던 때였다. 그래서일까. 그는 다수가 추구하는 기존의 틀을 깨고 자신만의 기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는 “너의 행동과 예술작품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 수 없다면, 소수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게 하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것은 잘못이다.” 라고 말했다.
클림트의 작품 중에서 내가 아는 거라곤 와 뿐이었다. 는 그의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화려한 색들을 사용하지 않았다. 무채색의 모자를 쓰고 모피를 두르고 있는, 시선은 어느 한쪽으로 몰린 채 무언가를 응시하는 한 여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몽롱한 눈빛의 그녀는 취기가 오른 것도 같고, 어떤 슬픔에 잠긴 것도 같기도 하고, 심지어 비밀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눈이 풀린 모습 때문인지 지쳐 보이기도 하고, 슬픔이나 분노 그리움을 억제하고 있는 것도 같다. 몇 번인가 그 여자의 눈을 바라보았지만 그때마다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 그녀의 눈빛은 영원히 풀 수 없는 마법처럼 날 끌어당긴다.
을 본 것은 앙드레지드의 지상의 양식이란 책 표지에서였다. 황금빛의 색채가 눈이 부실만큼 아름다웠는데 그 그림이 바로 클림트의 작품이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은 제목처럼 사랑을 나누고 있는 두 소녀를 그린 작품이다. 와는 다르게 평소 그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황금빛 색채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그림 맨 아래쪽에 보이는 물고기는 클림트 자신이었을까. 동성애에 관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는 그는 그녀들의 쾌락을 탐닉하고 있는 것일까? 클림트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찬란한 황금빛과 작품에 공간을 남겨두지 않고 미세한 곳까지 화려한 색으로 장식해놓았는데 이 그림도 마찬가지다.
예술에는 자유를! 이라고 외치던 클림트의 작품에는 당대의 도덕적 규범을 무너뜨리고, 화려한 색채를 통해 자신을 표현한 것들이 많다. 그는 나체와 성, 특히나 여자의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그런 그에게 환호하는 반면 비난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럼에도 자신의 가치관을 버리지 않고 꿋꿋이 작품생활을 한 그가 존경스러웠다. 헤르만헤세 데미안의 구절이 떠올랐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고 나와야 한다. 그가 하나의 세계를 깨고 나오지 않았다면 남들과는 다르고, 보다 더 창조적인 작품을 그릴 수 있었을까.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내 눈길을 끌었던 건 바로 였다. 고요하고 평화롭게 눈을 감고 있는 아름다운 여자가 달콤한 꿈을 꾸고 있는 듯한 한 아이를 안고 있고, 그 뒤에는 회색빛 머리를 늘어뜨린 채 노쇠한 한 여자가 고개를 떨구고 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는 환하게 색칠되어 포근하면서 아늑함을 주다가도 그 뒤에 서 있는 여자를 보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암울의 늪에 빠져있는 것 같달까. 그 여자의 존재만으로도 어둡고 음침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녀는 왜 그들의 뒤에 서서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서 있는 걸까. 그여자는 즉 죽음을 뜻하는 걸까. 삶의 끝에 찾아오는 죽음 앞에서 좌절한 채 괴로워하고 있는 걸까.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건 ‘왜 인간의 세 시기가 아니라 여성의 세 시기일까’ 그것은 어쩌면 누이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여자의 생에 대해 고민한 클림트의 흔적일지도 모르겠다.
그림 한점을 들여다보는 시간은 짧지만 그것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클림트의 색채나 초상화에 그려진 인물들의 손짓이나 눈빛 등을 통해서 각각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는 것이 참 새롭고 신기했다. 무엇보다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이라고 외치며 하나의 새장처럼 자신을 가두었던 틀에서 벗어나 훨훨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그림을 그렸던 클림트의 작품들이 내 가슴속에서도 자유롭게 날갯짓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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