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죽음의 두려움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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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죽음의 두려움 -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읽고
책이라고 하는 건 몇 편의 동화 정도밖에 읽어보지 않았던 시절, 내게는 죽음이라는 것을 너무 무서워하던 시기가 있었다. 즐겨보던 TV 속 인물의 죽음을 목격해서인지 아니면 스토리상 동화 속 주인공이 비참하게 죽어서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세상이 조용해지고 창문을 통해 주황색 가로등 불빛밖에 보이지 않던 밤이 오면 새삼 죽음이라는 게 너무 무서워서 잠도 자지 못하고 혼자서 끙끙 앓았던 기억만 있을 뿐이다. 울면서 어머니께 말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갑자기 왜 그러니? 괜찮으니까 그냥 자. 내일도 유치원 가야 하잖니.”뿐이었다. 그 이후론 그냥 혼자 두려움을 삭혔다. 다른 사람에게 말해봤자 아무도 내 고통을 이해해 줄 수 없었다. 그저 잠들기 위해 눈을 감았을 때 죽음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에 빠지지 않고 잠들면 그날 운이 좋은 거였고, 그렇지 않으면 부들부들 떨면서 새벽까지 밤을 새곤 했다. 가만 생각해보면 내 불면증이 이때부터 시작됐던 것 같다.
물론 죽음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몰랐다. 그 사실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단지 내가 죽으면 내가 아는 사람들과 헤어지고, 나라는 존재는 시간이 지나 잊혀 질 것이고, 죽은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무서웠다. 내 손자가 다음 손자를 낳고 또 그다음 손자를 낳고 그 과정이 이 지구가 폭발할 때 까지 반복되고... 그런 억겁의 세월동안 혼자 쓸쓸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피식 웃음이 나오는 일이지만 어릴 적 나에겐 끔찍한 고통의 시간이었다. 내가 이 고통에서 헤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고, 그 영혼은 죽어서 하늘나라에 잠시 있다가 다시 다른 이름, 새 생명으로 태어날 거라고 믿으면서부터다. 어찌 보면 불교의 윤회사상과 맞아 떨어질 수도 있지만 이것은 분명 종교나 다른 어떤 것의 도움도 받지 않고 나 혼자 생각해낸 것이다. 이렇게라도 믿지 않으면 불면증으로 진짜 죽을 수도 있을 거라고 느껴졌기 때문에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속에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 혹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정확히 이해해야 할 현실이다.”는 식의 죽음에 대한 명제를 접하게 되면서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 책의 죽음과는 관계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 어린 시절 나는 영적인 ‘나’를 믿고 있었다는 점이다. 세상을 살면서 점점 사회화되고, 멀리 있는 죽음보다는 당장 코앞에 닥친 성적, 진학, 취업 따위의 두려움에만 신경 쓰면서 어느새 나 자신이 그런 믿음이 있었다는 사실도 잊어버렸지만, 불과 몇 달 전 대인간커뮤니케이션 수업을 들을 때만 해도 ‘교수님이 지금 무슨 말씀 하시는 거지?’라고 생각하며 전혀 이해 못하곤 했지만 말이다. 어린 시절 죽음에 대해 고민하던 순진한 나와 마주하면서 그리고 보통은 콧방귀 뀌며 외면하는 영적인 나의 존재를 순진한 시선으로 인정하면서 이 진리들은 내게 새롭게 와 닿았다. 순수한 상태의 차선책으로 순진을 선택한 것이 옳았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16주라는 짧은 시간동안 배운 진리를 공감하고, 죽음을 진지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나름 괜찮은 판단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이별이다.”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삶의 마지막 순간에는 반드시 ‘절대적 홀로’를 경험하게 된다. 이 절대적 공의 순간에 만남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근원적인 외로움을 깨닫게 된다. 외로움의 의식 없이 혹은 외로움을 억지로 외면하면서 살았던 사람들도 마지막 순간에는 이 외로움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뒤늦게 진정한 만남을 그리워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미리 죽음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절대적 일회성 그리고 유일무이성의 존재이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 후회보다는 그 이전에 만남을 경험하고 행복해 지는 게 더 어울린다.
어린 시절 날 괴롭히던 죽음과 유사하면서도 사뭇 다른 의미의 죽음에 ‘아하!’라는 감탄사보다는 ‘음..’이라는 소리가 먼저 나온다. 결국 죽음이란 것을 정리하자면 절대적 홀로로서의 죽음도 있지만 ‘나’의 부재라는 의미의 죽음도 있다. ‘나’를 영적인 나로 인식하지 않고, 몸적인 나로 이해하면서 내가 사라지는 것이 우리가 숨을 쉬는 도중에 경험할 수 있는 죽음이다. 이것이 행복감을 행복으로 착각하면서, 몸을 우상화 하면서, 행복감의 대상에 존속되면서, 관계를 단순히 소유와 소유되어짐으로 인식하면서 각각 나의 죽음, 행복의 죽음, 몸의 죽음, 향유의 죽음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관계, 인격, 이데올로기, 존재의 죽음을 거쳐 의미의 죽음까지 이어진다.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고, 지양해야할 죽음들이 바로 이런 죽음들인 것이다. 반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죽음도 존재한다. 몸적 자아의 죽음 즉 나 자신을 죽이고 상대방에게 용해되는 것, 진정한 만남을 이루기 위한 초석으로서의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과거의 나는 생물학적 죽음만을 걱정했다. 그래서 ‘나’라는 영의 존재를 어렴풋이나마 인식했고 그 덕분에 평범한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헤어짐이라는 것을 두려워하기도 했지만 물론 이런 사실만으로 예전부터 내가 진리를 본능적으로 깨치고 있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제는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과연 내가 생물학적으로 죽기 전 절대적 외로움을 진정한 만남의 부재를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앞선 해결방식처럼 내가 단순히 믿는다고 해서 풀리는 숙제가 아니다. 지금은 아닐지라도 언젠가 또 이 문제 때문에 고통 받고 잠을 못 이루는 경우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진정한 만남을 위해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동질성과 타자성이 공존하는 사랑 경험하고, 그 속에서 행복을 느끼기 위해 나를 죽일 줄 아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