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소감문
‘나’는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닌 영적인 존재이다. 흔히 ‘생각=마음=나’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호르몬 작용과 생물학적인 현상을 관찰하며 이것이 생각이 일어나는 현상이고 곧 ‘마음’의 정체를 설명해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신경생물학자들도 ‘나’의 정체에 대해선 함구한다. 뇌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작용들은 ‘나’가 생각을 하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현상일 뿐이다. 뇌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저 너머에 생각하는 주체인 ‘나’가 존재해야 하는데 사람들은 이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나’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묻어둘 뿐 더 이상 이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는다. ‘나’를 알지 못하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의 삶을 살 뿐이다. 마음이나 몸이 아닌 내가(=나의 영이) 나의 삶의 중심을 선택하면 나의 성품에 영향을 주고, 이를 바탕으로 지식을 습득하고 지성(지혜)으로 판단하며 몸을 통해 느껴지는 감각지각과 이성의 비교·분석·판단 능력들과 결합하여 상상력을 동반한 욕망을 만들고, 욕망이 의지로 발전하여 행동으로 이어지고, 행동이 쌓이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모여 생활이 되고, 생활이 모여 삶으로, 결국 삶이 나의 운명을 결정한다. 즉 나를 아는 것이 나의 운명을 결정하는 시발점이 되는 것이다.
‘나’의 모습을 몸이나 마음과 착각해서는 안 된다. 몸은 가시적이므로 철저히 가시적인 것만을 욕망하게 된다. 몸의 욕망을 나의 행복과 동일시하게 된다면 내가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고, 그것은 곧 죽은 삶과 같다. 현재 세상엔 이러한 죽음에 취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몸을 나로 착각한 삶이란 몸의 욕망에 따라 마음의 모든 사유와 행위를 조율한다. 자아와 행복의 뿌리가 ‘나’또는 ‘몸적 자아’로 결정되면 바로 마음이 작동한다. 근본적으로 마음은 ‘나’의 시녀다. 마음을 선하게 또는 악하게 먹도록 만드는 것은 나(영)이다. 마음은 내가 원하는 것을 결정하면 그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해 도와줄 뿐이다.
지금 전 세계는 짝퉁 행복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행복을 수치화하는 기준인 행복지수를 보면 그 단면을 알 수 있다. 행복지수는 크게 ① 육체의 욕망(생존), ② 자극의 욕망(쾌락), ③ 비교의 욕망(성공)으로 분류된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행복지수의 주체는 ‘몸’이다. 행복지수가 높다는 말은 ‘몸’을 ‘나’로 여긴 채 잘 살아왔다는 뜻이다. 삶 전체가 본능적인 몸의 만족을 위해 존재하게 되면, 그것만이 현실적인 것이라 여기게 되고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은 이상적인 것일 뿐이라고 치부해버리게 된다. 하지만 행복지수는 정확하게 말하면 행복 자체가 아니다 행복하다고 느끼는 감정, 즉 행복감을 나타낸다. 행복감은 내가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나로 하여금 행복감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감각적인 흥분은 반드시 내성을 지니므로, 좀 더 강한 것을 지속적으로 찾게 될 수밖에 없다. 행복감도 마찬가지다. 행복감은 늘 사람을 굶주리게 만들고, 그래서 필연적으로 인류를 행복감의 중독으로 이끌어왔다. 욕망의 주체는 나의 몸인데, 자기 자신의 행복으로 여기는 이유는 인간의 마음(지정의)가 발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욕망이 증폭되고 지능지수만 발달한 영리한 늑대이기 때문이다. 욕망의 근본은 이기심에 있으므로, 모든 행동은 경쟁을 통한 짓누름을 향해 있다. 타인도 얼마나 나의 행복감에 기여할 수 있는가에 따라 점수매겨지고, 도구로 전락될 뿐이다. 이렇게 서로를 사물화하여 수단으로 삼고자 하는데 의미있는 인간관계가 형성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느끼는 외로움은 지극히 논리적인 결과이다.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사물로 대함으로써 결국엔 혼자만 남겨지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외로움은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행복감의 길은 끝이 없는 시시포스의 벌과 같다. 시시포스가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끊임없이 산꼭대기로 올리듯, 설국열차가 매년 지구를 한 바퀴 돈 후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 운행을 시작하듯 끊임없는 쳇바퀴를 도는 것과 같다. 행복감의 끝엔 절대로 영원한 행복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행복감의 쳇바퀴 속에 살다보면 어느 순간 그 삶의 패턴 자체가 공허하고 지겨워지게 되는 날이 반드시 찾아온다. 우리는 이 패턴에서 벗어나, 설국열차를 밖에서부터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살아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 살아있다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고 죽음이란 변화가 멈추는 것이다. 살아있는 생명이라면 모두 죽음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난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말하는 스피노자는 어떻게 죽음 앞에 초연할 수 있었을까? 그는 “나는 신이기 때문에 불멸이며, 당연히 죽음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실체(substance)를 어원적으로 풀이하면 ‘모든 만물의 밑에서 만물이 존재하도록 그 토대와 근원이 되어주는 존재’라는 뜻이다. 스피노자는 이를 ‘자기 스스로의 존재원인이 되는 존재(causa sui)’라고 말한다. 그런 존재는 당연히 신일 수밖에 없다. 신의 존재는 변화하지 않는다. 즉, 변화의 세계를 벗어난 존재란 뜻이다. 변화의 세계 안에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스스로가 변화의 원인이 될 수 없다. 변화를 일으키는 존재는 변화 밖의 존재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은 실체이다. 그러므로 신은 변화에서 벗어난 존재이므로 신에게는 죽음이 소멸이 될 수 없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논리를 확장시켜 범신론으로 나아갔다. 신은 실체이자 존재이므로 그 존재가 흘러넘쳐 가시적인 영역에서 표현된 것이 우주, 자연, 인간 등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도 신이고 인간도 신이다. 따라서 인간도 신의 모습 중 하나일 뿐이므로 죽음은 소멸을 의미하지 않고 단지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므로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이러한 논리는 모든 인간 개개인은 신이 모습을 드러낸 하나의 형태들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정말 인간이 신의 일부라면 개체 사이의 본질적 차이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모두 동일한 존재인가? 몸은 그렇다. 모두 ‘흙’에 불과하다. 하지만 존재들의 개별적 ‘나’는 모두 동일하지 않다. ‘나’는 영적 존재다. 물질이 아니니 죽는다고 소멸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결코 죽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몸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신체는 죽음의 결과 소멸하는 물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몸의 죽음은 몸이 극대화되었을 때 나타난다. 삶의 방향은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나→마음→몸’의 순서로 전개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몸→마음→나’의 순서로 전개되어 순서가 전도되면 제멋대로 할 수 있는 몸은 좋다고 날뛰겠지만 실상은 죽은 것이다. 몸이 ‘나’의 중심이 되면 내가 아닌 ‘몸’이 나의 중심이 되고, 몸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되며 몸의 운명이 결국 나의 운명을 결정하는 꼴이 된다. 이때 진정한 나는 죽는다. 진정한 내가 죽으니 나의 몸도 죽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나의 행복이 몸의 행복감과 동일시 되었을 때, 그 때 나의 몸은 가장 살아나고 그렇게 몸은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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