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산 대지진 영화 감상문
영화 ‘당산 대지진 After shock’는 크게 자연재해로 인해 무너져 버린 가족의 삶과 살아남은 자들의 잔인한 현실을 사실감 있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현실을 담담히 살아가는, 극복해내는 가족을 그린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가족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기 위한 방법으로 희생을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저는 무형의 희생을 표현하기 위한 유형의 방법, 가족애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도구를 이라고 보았습니다. 또한 여기에서 은 주인공들의 여러 가지 감정을 시청자에게 보다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한 매개체라고도 보고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 그 자체로도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이미 과학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사랑한다, 고맙다고 말한 물의 결정체는 아름답게 선명한 반면에 싫다, 밉다고 한 물의 결정체는 뭉그러져 예쁘지 않다고 합니다. 또 단순히 지닌 어떤 생각이 말을 함으로써, 그 말을 들음으로써 더욱 더 견고해진다고 하는 것 역시 그렇습니다. 흔들렸던 생각이, 말 하면서 자신이 정말 확고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뇌에게 확신을 주어 견고해진다고 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말이 주인공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말을 통해 어떻게 가족애를 표현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 그리하여 결국 이 영화가 우리에게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영화 초반의 이 가족은 선풍기 하나에도 기쁠 수 있는 소박한 행복을 지닌 평범한 가족입니다. 가족을 위해 아버지는 일을 하고 어머니는 음식을 만드는 그런 보통의 가족. 이 가족에서의 누나, 동생 역시 평범합니다. 남동생이 아이스크림을 빼앗긴 것에 대해 복수를 하고, 일을 하셨으니 선풍기 바람을 어머니 먼저 쐬라는 말에서 누나, 팡떵의 가족에 대한 사랑과 늠름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 남동생, 팡다는 숫기가 없어 약해 보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남동생에게 조금 더 마음이 쓰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마지막 남은 토마토를 남동생에게 주는 정도로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을 참을 줄 아는 누나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다음날 토마토를 사주겠노라고 말합니다. 을 합니다. 이 말은 나중에 어머니께 천추의 한이 됩니다.
그 날 밤 대지진이 일어나면서 아버지는 어머니를 구하고 아이들을 구하려다 죽고 맙니다. 남편을 잃은 것만으로도 힘든 어머니에게 두 아이 중 한 명만을 구할 수 있다는 시련이 닥칩니다. 물론 어머니는 둘 다 구해야 한다고 울부짖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한 명밖에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에 몰린 어머니는 결국 남동생을 구합니다. 여기에서 어머니는 어째서 남동생을 선택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겨납니다. 그 이유는 팡다가 살려달라고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눈앞에서 살려달라고 하는 아들과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딸이기에 했던 선택이라고 봅니다. 혹여나 딸이 들을까 아들을 살려달라고 하는 어머니의 말소리는 작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정확하게 아들에게, 딸에게 들려 이후 내내 쌍둥이를 괴롭힙니다.
팡떵은 살아남아 입양되지만 한동안 말을 하지 않습니다. 양어머니는 말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조급함을 느낍니다. 물론 그것이 혹시 장애인을 데려왔나 싶은 생각에 대한 불안감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후반부에 나타나는 양어머니의 말을 생각할 때, 소통을 하지 않아 부모로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은 느낌에 대한 불안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팡떵이 말을 하지 않는 이유는 어머니께 버림받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현실을 말을 함으로써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기 때문에. 앞서 말했듯이 자신이 말을 하고 들어버리면서 그 사실은 자신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 됩니다. 어린 그녀가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기에 팡떵은 말하지 않았던 것 아닐까요.
팡떵이 말을 하지 않는 것 때문에 양부모님이 대립까지는 아니더라도 작은 다툼을 하는 것과 곤란해 하는 것을 보고 처음으로 말을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학교에 이름을 얘기하고 등록하는, 즉 앞으로 살아갈 인생을 선택하는 장면입니다. 그 때 처음으로 말을 하며 자신의 이름을 왕떵이라고 합니다. 팡떵이 아닌, 왕떵. 이것은 양부모님을 받아들이고 왕떵으로서 살아가겠다는 의지라고 봅니다. 그리고 다른 것은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에서 그 사실을 외면하고, 어찌 보면 그녀 역시 어머니를 버렸다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양부모님과 대화하고 소통하며 그들은 가족이 되어갑니다.
세월이 흐르고 두 아이 모두 성장을 했습니다. 팡떵은 여전히 옛 기억에 괴로워하지만 양아버지의 말에 위로를 받습니다. 대립하는 양부모님을 안심시키기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당산에 가지 않겠다, 즉 가족을 찾지 않겠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여전히 친어머니를 용서하지 않는 것이 보입니다. 양어머니는 그동안 온전한 자신의 딸이 아닌 것 같아 멀리 보내는 것조차 불안해했지만 팡떵이 당산에 가지 않는다는 말에 안심합니다. 한편 어머니는 팡다와 함께 살아가지만 지전을 태우며 남편과 딸에게 주문을 외듯 집으로 오는 길을 설명하면서 여전히 그들에 대한 사랑을 드러냅니다. 어쩌면 그렇게 언젠가 돌아온다는 듯이 말하면서 그들의 죽음을 부정하려고 하는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마음이 있어보였던 남자를 단호히 거절하는 말 또한 계속 남편을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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