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자치이야기를 읽고
나도 아직 청소년이다. 사회의 관습으로 청소년들은 중학생 고등학생들에게 국한되어 있는 것 같지만, 나도 아직 청소년이다. 하지만 나도 중고등학생들만을 청소년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풀어 놓느냐 하면 내가 중고등학생일 때를 되짚어 보았기 때문이다. 책은 각 챕터와 챕터 주제에 어울리는 에피소드 형식이었다. 이 에피소드를 일일이 설명해주고 싶지만 그 중에서 몇 가지 공감과 이해를 이끌어 내었던 것들을 소개하고 감상을 늘어 놓고자 한다.
첫 챕터에서는 사교육을 강화하는 자율화 정책이라는 에피소드와 설교하지 맙시다 라는 에피소드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번 6장 토론내용과 부합하는 내용이라고도 생각하며 집중해서 읽었다. 강요된 자율화와 학원학습으로 혼란스러운 청소년들이 주인공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우리나라 현 교육정책은 형편없다고 생각된다. 말로만 자율학습시간이지 그 시간 동안에는 당연히 수능을 위한 공부를 해야 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 취미를 위한 학습 따위는 용납되지 않는다. 이 것의 어느 면을 보아야 자율학습인지 모르겠다. 가르치는 사람, 지도자를 앞에 세워두지 않는 다는 사실 만으로 혼자 ‘수능’공부를 해야만 하는 학습시간을 자율학습시간 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모순된 일이다. 심지어 이 시간에는 지도자가 없을 뿐 감독이 따라 붙는다. 정말 숨막히는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아이러니한 일은 이런 시간을 학부모들이 대 찬성한다는 것이다. 자율학습을 안 간다면 당연히 학원을 가는 것이고, 아이들이 감시 하에 ‘수능’에 대비한 공부를 하기를 바란다.
더 심각한 사실은 이런 자율학습 시간에 학교도 학원도 아닌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학생들을 보면 당연하다는 듯이 학교 안가고 뭐하니, 학원 안가니 등의 물음을 가지고 비행청소년으로 몰아간다는 사실이다. 더 충격적인 것은 문화의 집이나 청소년 수련관에 다니는 아이들을 무슨 어디가 모자라거나 부족한 아이들로 취급한다는 사실이었다. 언제 수능 공부를 할래, 대학에 가려면 학교에서 공부해야지 그런 곳에서 무슨 배움이 있고 공부를 한다고 그런 곳에서 허송세월 보내니 라는 식 이였다. 나 또한 중 고등학교 때 수련관에서 동아리 활동이나 봉사활동을 즐겼는데 부모님의 반응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내가 너 잘되라고 학원도 보내주고 하는데, 그런 곳에는 왜 가는 거니, 거기서 애들이랑 어울려서 놀러 다니고 성적 떨어지고 하면 대학은 어떻게 가려고’ 하는 물음이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다.
자녀가 잘되길 바란다면 공부, 물론 공부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이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활동할 수 있는 장소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논술학원에 간다고 해서 창의력향상 학원에 간다고 해서 자녀의 생각이 능동적이고 합리적이게 변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이미 충분히 합리적인 생각체계를 가지고 있다. 비록 그것이 자기중심적일 수도 있고 완성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학원에 간다고 학교에서 자율학습을 한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여러 사람을 만나고 활동을 하면서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완성체로 다듬어 가야 한다.
수련관이나 문화의 집은 청소년들이 모여서 자신들이 하고 싶은 활동이나 여러 사람이 모여서 관계를 맺는 등 작은 사회활동의 장이다. 학교나 학원만이 학생들의 공간이 아닌 것이다. 우리 사회의 관점의 문제점을 되 짚어 봐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세번째 챕터는 세상의 중심이라는 주제였고 이 중에서 길을 가는 이유에 집중했다. 내용 중에 유명대학에서 모 강사가 학생들에게 꿈이 무엇이냐 물었을 때 꿈을 이루었다며 대학에 들어왔다는 것이 꿈을 이루었다는 말에서 마음이 아팠다는 내용이었다. 꿈을 찾는 과정에 있어야 할 대학이 꿈의 종착지가 된 것이다. 나는 어떨까 생각 해 보았더니 나는 꿈이라는 것이 정말 명확하게 존재하는지부터 생각해야 했다. 중 고등학생 때부터 대학은 가야지, 무슨 일을 하게 되던지 대학은 나와야 대접받는다 라는 말을 들어왔다. 그래서인지 나도 대학에 들어온 이후로 길을 잃어 버린 것 같다. 어렴풋이 사회복지관련직에서 종사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성적에 맞춰서 대학에 가려는 마음에 급급해서 대학에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마음속에 자리잡은 것 같다. 나는 지금 길을 잃은 것 일까.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옳은 것 일까.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것 일까. 작은 의심이 불길처럼 내 마음을 잠식하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대학졸업하고 뭐 할래? 라는 물음에 나는 단순히 센터에 취직하거나 공무원 준비를 해야겠죠 라는 답을 하고 있었다. 내가 중 고등학생이었을 시절에 나처럼 학교생활이나 학원생활이 맞지 않거나 상처 입었거나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청소년들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을 때와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이 길이 나에게 어떤 이득을 줄 수 있을 까, 평생종사에 어울리는 비전을 가지고 있나 하며 이리 재고, 저리 재고 있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내가 장신대에 다니고 있을 때, 최혜정 교수님께서 독후감 과제를 내 주셨을 때 읽어 본 책이다. 3부에 가서는 읽는 것이 조금 힘들었지만 좋은 책이었다. 그 이후로도 생각날 때면 떠둘러 보던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이고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까라는 고민을 여러 번 해보게 만든다. 길을 가는 이유와 삶의 의미는 찾는 것은 같은 맥락일 지도 모른다. 로고테라피에 의하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가지 방법으로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첫 번째는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두 번째는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세 번째는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고 했다. 헌재의 내가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면 이 세 가지 방법을 거쳐야 한다는 뜻이다.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고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자기실현에 다가가는 한 축 일 것이다. 길을 가는 이유 또한 자기실현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된다.
세상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고 하셨다. 각자 자신의 중심이 있을 터이고, 자신의 길이 있을 것이다. 무슨 길을 가든지, 자신의 삶의 의미가 어디에 있든지 그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사실일 것이다.
네번째 챕터는 청소년은 시민이다 라는 주제를 다루었다. 이 챕터를 보면서 꾸준히 떠올렸던 것은 세월호 사건이었다. 이 사건 시위에서 “가만히 있으라” 라는 펫말을 들고 시위하던 학생들이 생각났다. ‘가만히 있으라’ 청소년도 시민이다. 청소년도 시민이고 자연스럽게 참여권을 갖는다. 그런데 왜 가만히 있으라 라는 시위 펫말이 등장했을 까. 우리 사회의 어른들은 청소년이 가만히 있기를 바란다. 가만히 앉아서 시키는 공부만 하고 시키는 시험을 보고 대학에 들어가길 바란다.
청소년이 시위에 참가하는 것은 교육정책상 청소년 정서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청소년이 사회의 일에 참여하는 것을 꺼려한다. 청소년을 미성숙하고 무지한 존재로 몰아가는 일이다. 너희들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라는 말을 한다. 여기에서 공부란 수능을 위한 입시공부에 국한된다. 사회참여를 위한 공부는 배제된다. 모순되는 점은 몇몇 선생님들은 뉴스도 좀 보고 사회상식을 좀 키워라 라고 말하시면서도 너희가 뭘 안다고 시위활동을 하니, 대자보활동을 하니 하면서 교육청에서 대자보활동을 금지하는 등 어이없는 공문이 내려오기도 했다. 청소년의 정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이유가 정말 청소년을 위한 일인지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무엇이 두려워 강제하는 것인지 의심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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