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독후감
죽음에 취한 자들
‘죽음을 깨달으면 그 죽음에서 죽을 수 있다. 그러면 깨어날 수 있다.’
우리에게 보통 죽음이란 심장이 멈추는 것, 즉 더 이상 무엇인가를 보고 느끼고 말할 수 없는 상태이다. 그런 뜻에서, 우리는 나를 포함해, 함께하는 모든 사람들은 다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 진정 그들이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수업시간을 통해 배웠기 때문에, 책을 읽기 전부터 진정한 생명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가지고 있었지만 책을 읽으면서 그 새로운 정의에 대해 더욱 깊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책은 총 11개의 죽음에 대해 깊게 논의한다. 이 모든 죽음은 영의 죽음을 전제로 한다. 영이 죽었기에, 진정한 ‘나’는 살아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살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먼저, 죽음을 깨달아야한다. 내가 죽어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내가 살아있음의 시작이다.
여기서 말하는 ‘나’란 진정한 나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나’와, 진정한 ‘나’는 다른 것일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나’란 존재는 사실 진정한 ‘나’의 짝퉁이다. 그 짝퉁은 바로 ‘내’가 아닌 ‘몸’이다. 몸을 나로 착각하여, 몸이 원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때로는 몸이 나보다 더 나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문제이다. 뛰어난 학벌, 높은 학점, 금전적으로 여유 있는 생활을 얻기 위해 노력해온 나의 모습이 문제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는 모두 진정한 ‘내’가 원하던 것이 아닌 나의 ‘몸’이 원했던 욕망의 불과했다. 몸이 요구하는 욕망들은 모두 이기심으로부터 시작된다. 내가 진정으로 보아야 할 것들을 놓치게 만든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까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한 한 어머니와 자식의 대화가 공감이 되었다. 한 어머니가 아이에게 나중에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말한다. 그러자 아이가 커서 게임만 하면서 살 것이라고 대답한다. 게임을 하고 싶은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몸’이 원하는 것이다. 즉, 아이처럼 아직 제대로 된 가치를 모르는 생명들에게는, 몸이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착각하지 않게 하기 위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닌, 올바른 가치에 부합하는 해야 할 것은 원하라고 말해주는 것이 더 옳다. 우리는 흔히, “네가 원하는 것을 해!” 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진정한 ‘나’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닌, 해야 할 것을 원해야한다.
영이 죽었다는 것은 몸의 행복감을 추구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행복감이란 행복의 짝퉁으로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행복감은 진정한 ‘나’가 주체가 아닌 대상이 주체가 되는 것으로 대상이 나로 하여금 행복감을 느끼도록 만든다. 많은 사람들은 행복감을 행복이라 착각하며 살아가고 나 또한 그 예외는 아니다. 내가 원하던 물건을 샀을 때, 맛있는 것을 먹었을 때, 친한 친구와 수다를 나눌 때에 느끼는 내가 생각했던 ‘행복’이라는 것은 결국 진짜 행복의 가짜에 불과했다. 행복감은 몸의 욕망과 마찬가지로 이기적이다. 행복감은 또 다른 행복감을 쫓아 계속해서 욕망의 계단을 올라가게 만든다. 좋은 대학에 입학한 다음에는 대기업 취직, 취직 다음에는 결혼, 결혼 다음에는 육아 등과 같이 끝없는 욕망을 낳는다. 여기서 제일 무서운 것은 행복감을 행복과 동일시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삶이 몸의 욕망인 행복감으로 가득 찬다면, 진정한 ‘나’는 죽게 될 것이다. 또한, 행복감을 추구하는 사람을 행복을 불행이 잠시 멈춘 상태라고 본다고 했다. 여기에 대한 예시로 영화가 끝나가면서 느끼는 초조함을 제시했다. 이 부분이 굉장히 공감 되었다. 내가 행복하지 않은, 즉 행복감을 쫓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 예시를 통해 깨닫게 되었다. 나는 밴드에서 신디를 치고 있다. 합주 시간에는 현실을 피해 합주에만 집중할 수 있어 나는 ‘행복’했다. 하지만 합주실을 딱 나오는 순간 다시 맞이한 바쁜 현실에 굉장히 갑갑했었다. 이러한 소소한 활동을 통해 느끼는 행복으로 나는 조금이나마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상 나의 영은 행복감만 쫓은 채 죽어있었던 것이다.
책은 몸의 죽음과 관련하여 뇌사에 대해 논의한 부분이 있었다. 책을 읽기 전까지는 아무래도 뇌사자들은 의학적으로, 보편적으로 죽은 사람이라고 보는 시각이 강하여 가족들의 동의가 있으면 존엄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뇌사인 상태는 뇌의 기능만 정지했을 뿐, 신체의 기능은 살아있는 상태로 살아있지도 죽어있지도 않은 상태라고 규정할 수 있다고 했다. 과학이 발달하며 뇌사자의 상태보다도 장기이식에 초점에 맞춰지면서 모든 뇌사자들을 그냥 시체로 치부해 버린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책을 읽으면서 더 강하게 들었다. 뇌사상태에서 아이를 낳은 엄마도 있었듯이, 뇌사자들을 시체로 취급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선한 일은 당위는 아니라는 부분이 크게 공감되었다. 따라서 증여 또한 강요될 수 없다. 요즘 세상은 너무 지나치게 선한 일이 당연시 되는 것 같다. 장기 증여와 마찬가지로, 모든 선행은 선으로 포장한 비도덕적 강요가 아니라, 본인의 가치판단에 의한 적극적 선택이 되어야한다.
더하여, 책은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실제로, 시간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시간이 존재한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시계는 존재하지만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지나간 현재, 지금의 현재, 다가올 현재만 존재할 뿐이다. 즉, 시간이 아닌, 변화만 존재한다. 그런데 모든 것을 현재로 경험하는 주체는 바로 나라고 했다. 즉, 현재는 ‘나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나 중심적’인 사람은 현재에만 머물게 되고, 과거와 미래는 경험하지 못하게 된다. 즉, 시간을 경험하지 못하는 ‘나 중심적’인 사람은 곧 죽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이 굉장히 논리적으로 다가왔고, 책을 읽으면서 아리송했던 부분들을 한숨에 해결해주었다. 과거와 미래를 살기 위해서는 바로 이런 자기중심적이고 독단적인 관점을 내려놓으면 된다. 즉,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타인이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를 포기할 때에, 진정으로 그를 이해할 수 있다.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이해할 수 있음의 시작이고, 그것이 바로 관계의 시작이 된다. 이는 결국 미래와의 만남으로 이어질 것이다. 나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말을 굉장히 많이 하고 살아왔다. 최근 약속을 하루 전에 취소한 친구에게 알바 하니까 바쁘니 이해한다고 했다. 나는 그 친구를 과연 진정으로 이해했을지 의문이 들었다. 아마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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