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험난한 예술의 길 가르침은 예술이다 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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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험난한 예술의 길 (『가르침은 예술이다』를 읽고)
임용고사를 준비하던 시절 같이 공부하던 동료들과 식사 때 틈틈이 나누던 대화 중에 ‘나중에 교사가 되면’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들이 참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IMF로 모두가 힘들어했던 고3 때 우리 세계사 선생님의 영향으로 사범대에 왔고, 하나님의 말씀이 열방으로 전파되는 과정이 너무도 감격스러워 역사라는 과목을 선택했다. 교사를 준비하고 희망하던 대학생 때에는 교단에 서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학생들이 존경의 눈빛으로 우러르는 그런 ‘인생의 스승’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우선 임용의 문은 좁았고, 교실의 아이들은 슈퍼주니어와 소녀시대의 팬클럽이었으며, 힘들게 입성한 교무실에는 처리해야 할 공문이 산더미에 NEIS 입력의 단순 노동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교직 3년차로 접어드는 이 시점에서 『가르침은 예술이다』를 읽고, 내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교사’와 지금의 나를 비교해보게 된 것은 굉장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존 반 다이크 교수가 정의 내린 ‘이원론적 교수법’은 지금껏 내가 해왔던 수업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학교 수업뿐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내 주변의 인간관계 속에서도 나는 ‘이원론적’인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고,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을 잘할까?’를 고민해보았지, ‘어떻게 하면 신앙과 생활을 연결해볼까?’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일원론적’인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내 신앙의 정도를 돌아볼 필요가 있었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전도’를 시작해야 했으며, 아이들을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양육해야 했다.
작년부터 내가 담당하고 있는 기독교 동아리는 ‘기독교중창단’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동아리 회원의 반절이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 내가 다니는 교회에 전도하려고 주일에 전화를 하면 전원을 아예 꺼놓기가 다반사이다. 이렇게 긴 장대위의 광대처럼 위태로운 우리 동아리를 회복시키기 위해 처음으로 제안한 것이 ‘서로를 알아가기’였다. 아이들 간에 유대감을 조성해주고 친밀감이 형성되도록 가능하면 모이기에 힘쓰도록 장려해 주었다. 일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아이들은 기도를 어색해하고, 예배를 회피하지만 한 가지 나아진 점은 CCM 밴드를 하겠다며 자기들끼리 일을 ‘꾸미기’시작했다는 것이다. 분명 아이들은 스스로 성장한다. 믿어주는 만큼 자란다.
조기교육에 대한 열풍이 황사처럼 불어대고 있는 요즘, 가정교육만큼은 아니더라도 학교에서의 잠재적 교육과정은 학생들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듯 하다. 학교라는 공간은 어쩌면 우리 사회의 축소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교사가 대중에 노출되어 있는 연예인처럼 학생들에게 일거수일투족이 노출되어 있는 것이 유사하달까. 하루의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는 우리 아이들에게 교사들은 또래집단 다음으로 영향력이 큰 존재다. 이렇게 수백 개의 눈동자 앞에 선 교사가 스스로 칼뱅이 이야기 했던 ‘직업적 소명’을 가지지 못한다면 ‘장인’이나 ‘여행의 안내자’ 역할은 기대할 수 없다. 내가 즐겨듣던 찬양 가사 속에는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가 정답과 해설처럼 들어있었다. ‘주님은 옹기장이 나는 흙’, ‘주의 지팡이가 푸른 초장으로 날 인도해’ 등의 찬양을 들어보면 예수님은 장인이자 안내자인 것이다. 기독교적 교육관에 입각한 ‘예수님을 닮은’ 교사란 바로 찬양 속에, 그리고 성경 속에 들어 있었다.
아이들에게 학기 초에 선사시대 부분을 강의 할 때 가장 처음 해주는 설명이 ‘창조론’과 ‘진화론’의 차이점이다. ‘창조론’이 진리이라고 강요하지는 않지만, ‘창조론’에 의하면 여러분의 삶이 더 큰 의미를 가진다고 이야기 해주면 학생들은 눈을 반짝이며 입가에 뿌듯한 미소를 머금는다. 자신이 아메바의 후손이 아니라 수천 년 전부터 택함 받아 태어난 귀한 존재라고 느끼는 것이다. 교사도 마찬가지이다. 어쩌다 보니 사범대학에 진학했고, 불안정한 사회 속에서 안정된 직장을 찾다보니 교사가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계획하신 원대한 꿈의 한 조각으로 내가 교단에 섰다고 선포하는 사람이 훨씬 더 능력 있는 교사가 되지 않을까.
작년에 첫 담임을 맡았을 때, 반 아이들을 소그룹으로 나눠서 팀을 만들어 주었다. 팀 이름을 정하게 했고, 팀별로 돌림노트도 쓰게 했다. 팀 구성원들이 시험 성적이 오를 때 마다, 청소를 잘 할 때마다, 학교 규칙을 잘 지킬 때마다 점수를 매겨주고 한달에 한번씩 포상의 시간을 가지곤 했다. 소그룹 운영의 결과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반 1/3의 아이들의 성적이 전교 상위권에 들었다. 문제는 학급 1/3에 해당하는 하위권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소그룹 활동에도 소극적이었고 두발단속이니 변형된 교복 단속이니 이런 생활지도를 하다보면 번번이 큰소리로 매를 들게 되고, 결국에는 처음에 의도했던 ‘화목하고 사랑이 가득한 학급’은 중학교 때부터 착실하게 학교생활을 해온 모범생 그룹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내 첫 협동학급 시도는 반절밖에 성공 못한 것일까? 반절이나 성공한 걸까?
존 반 다이크 교수의 기독교적 교직관에 대한 정의들은 공감 가는 바가 컸지만 구체적인 교수방법에 대한 이야기들은 날 씁쓸하게 했다. 그가 주장하는 ‘협동수업’이나 ‘간접교수법’은 물론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것들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방해물들이 너무도 많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저자는 내가 이런 변명들로 불만을 잔뜩 늘어놓을 것을 미리 예견하고 먼저 지적해 주었다. ‘시간’, ‘스트레스’, ‘좌절감’, ‘주지주의’, ‘실증주의’, ‘항존주의’, ‘실용주의’, ‘진보주의’, ‘구성주의’, ‘개인주의’, ‘평등주의’, ‘엘리트주의’, ‘세속주의’ 등이 그가 말한 방해물들이다. 나는 여기에 교사 개인의 생계문제, 가정문제, 동료교사와의 마찰, 학교 관리자와의 가치관 차이 등을 덧붙이고 싶다. 이렇게 나열해 놓고 보니 한숨이 먼저 나온다. 이 방해물들을 허들 넘듯 가뿐히 모두 처리하고, 예수님을 닮은 교사가 되는 방법은 무엇일까. 아무리 고민해 보아도 결론은 ‘기도’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인생의 간증 속에서 기도의 힘은 상당하다. 인간은 정말 연약하고 간사한 존재라 몸과 마음이 조금만 편해도 금방 하나님을 잊어버린다. 애굽을 무사히 탈출해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고, 오랜 임용고시생 생활을 벗어난 내가 그랬다. 그래도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심을 기억한다. 존 반 다이크 교수의 글을 읽으며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다짐을 다시 한번 해보았다. 새벽기도의 힘을 경험하고, 출근의 시작을 기도로 하며,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교실에 들어가기 전 짧고 강한 기도를 잊지 말자고 했던 그 때의 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