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 비평 작품의 이념적 근거를 중심으로 무정 비평 무정 줄거리 무정 독후감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인류를 불행하게 만든 위대한 발견이 둘 있다. 하나는 지동설이고 하나는 진화론이다. 전자는 인류가 세상의 중심이 아님을 이야기했고 후자는 인류가 순전히 우연의 산물임을 이야기했다. 양자는 인간이- 자기 자신의 존재가 특별하지 않다는데 귀결된다. 이 두 가지 발상은 태어난 이래로 무수한 논란의 한가운데 있었다. 인류가 우주 밖으로 나온 이후에 전자에 관한 논란은 종결되었으나 후자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무성하다. 사실 진화론만큼 많은 오해를 받은 이론도 드물 것이다. 그에 대한 오해와 망상은 진화론이 귀결되는 지점을 근본적으로 뒤엎은 데까지 나아가곤 했다. 독일 나치의 우생학과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이 그 예다. 그것들은 “우리는 특별하지 않다.”라고 말하는 진화론을, “우리는 특별하다.”라고 말하는데 응용했다. 제국주의가 미쳐 날뛰던 시대에 사회진화론은 진화와 진보와 식민논리를 같은 것으로 묶었다. 그 셋은 서로 상이한 것들이었지만, 시대에 갇힌 이들이 그것을 깨닫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광수의 의 이념적 기저가 자리한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동설이나 진화론처럼 우리 소설사에 거대한 변혁을 가져다준 이지만, 동시에 시대에 갇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제국주의의 근대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의 이념이 이곳에 근거하였음을 바탕으로, 시대를 변혁한 이 어떻게 시대에 얽매여 있는가를 중점적으로 분석해 볼 것이다.
은 우리 문학사에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그것은 명료한 사실이어서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이 우리 소설사에 최초로 온전한 근대를 들여왔기 때문이다. 최초는 때로 최고 이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이 가져온 전환이 얼마나 커다란가에 따라 더욱 그렇다. 시대정신을 극복하는 일은 가장 위대한 지성에게 조차 지난한 일이기 때문이다. 체제 안에서 뛰어나기는 쉬우나 체제를 바꾸는 것은 어렵다. 그렇기에 이광수의 은 중요하다.
앞서 신소설에서 근대의 양식을 실험해보긴 하였으나 그것들은 시대를 온전히 전환하지는 못했다. 이인직의 를 대표적으로 들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최초의 신소설이라 일컫는 만큼 형식과 내용에 있어 고소설과는 현저하게 다른 부분이 보인다. 그러나 그 첫인상을 제쳐놓고 이면으로 들어가면, 여전히 고소설의 문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알맹이가 남아 있다. 고소설의 특징적 면모인, 이야기를 지배하는 절대적 원리-혹은 관념 혹은 가치-가 여전히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온전한 근대라면 그것을 해체해야 마땅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단지 유교적 질서가 있던 자리에 신문명이라는 대체품이 놓여 있을 뿐이다. 따라서 신소설의 플롯 역시 규범적 문법에 따라 순환한다. 인물은 관념에 묶여 상투적이고 선악이 분명하다. 이야기의 시점이 ‘지금 여기’가 아닌 원형적 질서에 놓여 있기에, ‘-더라’투의 문체도 곧잘 드러난다. 다분히 전근대적인 셈이다. 이와 대비해 보았을 때 의 근대적 성격은 더욱 두드러진다.
은 고대의 신화세계에서 중세의 유교적 질서로 이어지던 이야기의 원형적 공간, 이야기를 지배하는 절대적인 관념을 해체한다. 천상의 논리가 폐기되었기에 서사와 인물, 시점과 문체 따위가 동시에 놓여난다. 지배적 관념에서 독립하여 오롯이 홀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지상의 인간, 실존하는 근대인이 나타나며, 그 근대인의 자유의지에 따라 서사가 전개된다. 따라서 플롯에는 이렇다 할 규범적 문법이 없다. 문체도 거의 구어적이며 편집자적 논평이 일부 보이기는 하나 완연한 근대소설에 가깝다. 관념적 공간에 묶여 있던 시점이 현재와 미래를 향해 달린다. 문체에서 ‘-었다’체가 지배적인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야말로 시대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그러나 속의 ‘근대’가 과연 건강하고 온당한 것인가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것은 의 근대가 철저히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주어진 근대이기 때문이다. 이광수는 우리 소설사가 중세에서 근대로 전환하는데 커다란 공을 세웠지만, 그러한 전환은 온전히 그 스스로 이룬 것은 아니었다. 그는 혁신적 발상자, 최초의 코페르니쿠스가 아니라, 단지 봉건 조선을 폐기하고 신문명을 선택한 수용자에 불과했다. 이인직의 가 거리낌 없이 친일을 이야기하고, 이광수의 이 현실에 핍진하게 다가서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변혁은 분명 획기적인 일이었지만, 들여온 것이 남의 것이었기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한계를 드러내고 만다. 작가 자신들은 친일하였고, 작품 자체에도 두고두고 비판되는 여지를 남겨둔다.
이때 ‘주어진 근대’는 서론에서 언급한 바 있듯, 진화와 진보와 식민논리를 동일시하는 논리 위에 세워진 뒤틀린 근대, 뒤틀린 현실인식이다. 이때의 진화는 은유적 의미로서의 진화다. 이른바 ‘좀 더 발달한’ 과학 기술과 사회 제도, 가치체계 따위를 말한다. 핵전쟁을 하는 시대의 인간이 신석기 시대 공동체의 인간보다 더 행복한가에는 대답할 수는 없음에도, 당대에는 이러한 진화가 곧 진보라고 믿어졌다. 진보가 존재한다는 믿음, 그리고 진화가 그러한 진보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믿음, 번영에 대한 ‘위대한 약속’은 차라리 하나의 신화였다. 이 신화는 더 진화한 것은 더 진보된 것, 즉 ‘좋은(Good) 것’이고, 역으로 진화하지 못한 것은 덜 진보된 것이며 ‘좋지 않은 것’이라는데 귀결된다. 그래서 열강의 식민 정책은 합리화된다. 그들의 지배는 약육강식의 자연법칙에 따른 자연스러운 것이며, 식민지인들이 지배당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약하고 좋지 않기 때문이다. 이광수는 이러한 논리 위에서 근대를 수용했고, 에 드러나는 이념의 근거 역시 여기에 있다. 그렇기에 의 현실인식은 당대 현실과 동떨어져 있고, 안일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명제는 ‘문명개화’다. 그것은 진화에 대한 갈급이고 근대성에 대한 추구다. 그러나 이광수에게 문명개화란 미개, 반개화, 문명개화의 선조적 관점에서 파악되었던 것으로, ‘선(Good)’의 가치를 함의한 것이다. 이러한 논리 위에서 현실은 개화와 미개의 이분법으로 재단된다. 이는 수직적인 구조다. 그렇기에 에는 시혜자적 위치의 개화인과 수혜자적 위치의 미개인이 보인다. 형식의 직업이 선생인 것은 단순한 사실이 아니다. 그는 문명인으로서 어리석고 불쌍한 학생들, 깨이지 못한 미개인들을 가르친다. 이러한 스승과 제자의 구도는 평양으로 가는 기차 안의 병욱과 영채에게서도 보인다. 형식과 선형, 영채의 아버지 박진사와 형식의 관계 등, 이러한 구도는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엮는 중요한 기제로 작용한다. 시혜자와 수혜자의 위치는 사제관계의 구도에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작품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수해 구제 장면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 있다. 미개하기에 힘이 없어 속절없이 죽을 지경인 수재민들에게, 개화한 인물인 주인공들이 ‘음악회’를 열어 ‘신사 숙녀 제씨들’의 성금을 모아 전달한다. 그리고 종막에서 주인공들은 힘없는 조선 민중을 구원하기 위해 문명을 익히러 떠난다. ‘시혜자’인 주인공 일행과 ‘수혜자’인 조선 민중인 셈이다.
이렇게 에서 수혜자의 위치에 서게 되는 미개인들은 끊임없이 괴로워한다. 무지하고 힘이 없어서 고통 받는다. 작품에서 보이는 괴로움 중 상당부 분은 미개함의 탓이다. 영채는 봉건적 발상에 따라 자살을 결심하고, 병국 내외는 원치 않은 조혼으로 불행한 결혼생활을 한다. 삼랑진의 수재민들은 힘이 없고 지혜가 없기에 홍수 한 번에 모든 것을 잃는다. 이러한 점은 작품 내의 언술로써 직접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여러분의 조상은 결코 여러분과 같이 마음이 썩어지지 아니하였고 여러분과 같이 게으르고 기운 없지 아니하였소.” … 함교장은 여러 가지로 조선 사람의 타락한 것을 개탄한 뒤에 일단 더 소리를 높여…
하룻밤 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발발 떠는 그네들이 어찌 보면 가련하기도 하지마는 또 어찌 보면 너무 약하고 어리석어 보인다. 그네의 얼굴을 보건대 무슨 지혜가 있을 것 같지 아니하다. 모두 다 미련해 보이고 무감각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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