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 관련 영화 감상문 허리케인 카터

 1  사회복지 관련 영화 감상문 허리케인 카터-1
 2  사회복지 관련 영화 감상문 허리케인 카터-2
 3  사회복지 관련 영화 감상문 허리케인 카터-3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사회복지 관련 영화 감상문 허리케인 카터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허리케인 카터
후배들을 통해 과제에 대해 들었을 땐 사회복지에 관한 영화라고 해서 사회복지사가 나오는 ‘에린 브로코비치’나, 특정대상이 나오는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 등과 같은 영화들 만 생각했었다. 이는 내가 정의내리고 있는 사회복지가 특정대상에게 이루어지는 서비스 같은 것만을 내포하는 좁은 의미의 사회복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수업시간에 배우고 머리로 생각하기로는 모든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넓은 의미의 사회복지를 생각하고 있지만 무의식적으론 그렇지 못 하다는 말이다. 이를 반성하며 목록의 영화들을 살피던 중, 예전엔 그냥 억울한 누명을 쓴 복서의 얘기를 다뤘다고 생각했던 ‘허리케인 카터’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다. 고등학교 땐 그냥 인종차별을 비판하는 이야기이며 감동적인 드라마였던 영화를 3년 동안 사회복지를 전공한 준사회복지사로 다시 봤다. 내용은 변함없이 억울한 누명을 쓴 흑인 복서의 생애를 다룬 것이었다. 불운의 복서 허리케인의 이야기, 세계를 재패할 수 있었던 복서의 이야기이다.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카터는 어렸을 때 친구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칼을 쓰게 된다. 그러나 그 대상이 지역의 유지였으며 그가 흑인이라는 것이 문제가 되어 소년원에 가게 되고, 델라 페스카라는 형사와 엮이게 된다. 그 후 소년원을 탈출하여 굴레를 벗어보려 낚하부대를 다녀오지만 델라 페스카형사는 그를 가만 나두지 않는다. 그를 다시 감옥에 보내지만 그는 감옥에서 복싱연습을 열심히 하여 출옥 후 촉망 받는 복서가 된다. 그러나 페스카 형사의 노고로 그는 살인죄라는 누명을 쓰고 다시 감옥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오랜 사투 끝에 누명을 벗고 풀려난다는 얘기이다. 그가 인생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낸 죄명은 ‘흑인’이라는 것이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무시 받았으며 사회의 악으로 정의되었다. 또한 다 이긴 경기에서도 졌다는 판결을 받았으며 살인을 안 했음에도 무기진형 선고받았다. 이는 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 당시에 많은 흑인들의 이야기이며 사회의 편견이었다. 사회의 편견은 페스카 형사와 배심원을 통해 흑인들의 삶은 카터를 통해 보여준 것이다. 그 당시의 사회는 편견과 차별로 흑인들을 대하였고 이에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행동들을 폭동으로 정의 내렸으며, 그들을 사회의 악으로 정의하고 진압하고 처벌하였으며 인간이하의 대접을 하였던 것이다. 여기 또 다른 정의와 편견이 있다. 영화 ‘뻐꾸기 날아간 새’(이하 뻐꾸기로 칭하겠다.)가 그것이다. 영어로 ‘Cuckoo(뻐꾸기)’는 바보, 멍청이, 정신병자를 의미한다. 그럼 ‘Cuckoos Nest(뻐꾸기 둥지)’는 정신병원을 의미 할 것이다. ‘One Flew over the Cuckoos Nest(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는 주인공의 심정을 말해 주는 것일 것이고 말이다. 그러나 난 여기서 “왜 ’Cuckoo‘는 영어로 바보, 멍청이, 정신병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뻐꾸기처럼 영리한 새는 없을 것이다. 다른 새들의 둥지에 알을 낳아 주택마련이라는 난제와 육아 및 보육이라는 난제를 한방에 해결하는 것을 보라, 거기에 어느 정도 새끼가 자라고 나면 다시 찾아와 데려감으로 종족보존까지 완벽하게 해낸다. 그들은 영리하다 못해 교활하기까지 한 것을 알 수 있다. 근데 왜 뻐꾸기는 그들과 안 어울리는 의미의 바보, 멍청이, 정신병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사람들이 아니 권력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아마 뻐꾸기를 정상적인 새와 다른 비정상으로 생각하는 또는 사회의 질서에 맞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일 것이다.)이 그렇게 정의 내렸기 때문이다. 주인공 맥머피 또한 그렇게 정의 내려진 사람이다. 맥머피는 사회질서를 어기고 사회에 순응하지 못해 감옥에 수감된 범죄자이다. 그러나 감옥에서도 그 사회의 질서를 어기고 그 사회에 순응하지 못하여 정신병자라는 정의를 받게 된다. 정신병원에서 또한 그곳의 질서를 어기고 순응하지 못 한다는 이유로 정신병이 없다고 진단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정신병자에게 행하는 전기치료를 받는다. 맥머피는 정신병자가 아니었지만 사람들의 정의와 대우로 진짜 정신병자가 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정신병자‘는 정신적인 병을 가진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에서 흔히 통용되는 정상인의 대립되는 ’비정상‘이라는 의미를 내포한 것이다. 우리사회는 정상과 비정상을 나눈다. 정상이 아닌 것은 배척하고 무시하며 소외시킨다. 허리케인 카터에서는 백인은 정상이고 흑인은 비정상일 것이다. 정상이 아닌 비정상은 사람이 아니다. 그들에겐 인권은 없다. 카터는 범죄자로 맥머피 는 정신병자로 살아간다. 물론 범죄자도 정신병저도 인권은 있다. 그러나 사회가 그렇다. 그들을 비정상이라 정의하고 정상과는 다르게 대한다. 그것이 편견이고 차별이다. 잘 못된 정의와 편견으로 카터는 교도소에 감금됐다. 그리고 맥버피의 친구(정신병원에 자진해서 들어온 환자들)들은 사회로부터 도피했다. 정신병원으로 말이다. 그들은 그 곳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는 정신병원에서 받는 비인간적 대우보다 사회에서 받았던 차별, 대우, 눈초리 등이 더 두렵고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비정상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처우 말이다. 이는 맥머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범죄자였던 그 역시 마지막에 망설이다 나가지 못한다. 병원생활을 싫었지만 그를 범죄자로 보지 않고 따르고 같이 지냈던 친구들과 함께 있는 꽉 막힌 병원이 범죄자라는 낙인을 받고 사는 사회보다 좋았을지 모른다. 그들은 정상이데올로기의 피해자인 것이다. 난 정상과 비정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차이와 다름이 존재 할 뿐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분류는 사회의 통재와 권력을 위한 비난과 배재, 소외를 위해 권위자들이 만들어 놓은 것일 것이다. 영화의 페스카 형사와 레취드 간호사와 같이 말이다. 우리는 알아야한다. 그들은 흑인 또는 정신병자가 아니다. 그들은 루빈 카터이며 맥머피이다. 차별을 위한 분류의 한부분이 아닌 그들 개개인으로 인식해야한다는 것이다. 허리케인 카터의 캐나다인들과 뻐꾸기의 맥머피처럼 말이다. 캐니다인들은 레즈를 흑인으로 그래서 사회의 악으로 생각하기 보단 능력 있고 똑똑한 청년으로 생각하고 사회의 편견에서 나올 수 있도록 도와준다. 맥머피 역시 정신병원의 친구들을 환자로 보기 보단 동료로 친구로 생각하고 대한다. 이처럼 사회적 편견으로 사회적 자대에 맞추어 사람을 대하기보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개개인의 특성을 이해하고 받아드리는 것은 사회복지사에게 필요한 능력일 것이다. 장애인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편견과 사회적 자대에 의한 분류의 하나의 틀로 장애인을 보기 보다는 나와 같은 사회적 객체로서 그들을 바라보고 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에게도 이름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