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역사 기행문 황사평 관덕정 항파두리 평화박물관

 1  제주도 역사 기행문 황사평 관덕정 항파두리 평화박물관-1
 2  제주도 역사 기행문 황사평 관덕정 항파두리 평화박물관-2
 3  제주도 역사 기행문 황사평 관덕정 항파두리 평화박물관-3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제주도 역사 기행문 황사평 관덕정 항파두리 평화박물관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제주도 역사 기행문 (황사평, 관덕정, 항파두리, 평화박물관)
모이기로 한 학교 정문에 도착해서 아침으로 샌드위치랑 커피를 먹으면서 기다리니 다른 학생들과 교수님이 도착했다. 일요일에 답사를 간다고 해서 다소 귀찮기도 했지만, 사회학과로 전과를 한 뒤 학교 밖으로 나가는 첫 수업이라 설레는 마음도 있었다.
교수님 차량과 다른 학생의 차량 2대에 나눠 타서 9시40분쯤에 황사평에 있는 가톨릭교구묘지로 출발했다. 묘지 입구 좌우로 비석과 묻혀있는 사람들 중 몇 명의 일생을 요약해 놓은 푯말이 있었다. 한자를 몰라서 비석에 쓰여 있는 글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는데 황사평, 순교자 이런 단어가 쓰여 있었던 것 같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묘지가 생긴 과정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일제 강점기 전에 프랑스 신부들이 제주도에 포교를 위해서 왔었다. 처음 온 신부는 별로 환영 받지 못하고 돌아갔다. 후에 구마슬 신부가 왔는데, 그는 고종황제의 힘을 업고 제주 목사의 협조를 얻게 된다. 덕분에 가톨릭 신자는 갈수록 늘어나서 도내에서 어느 정도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이들은 세력을 등에 업고 가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신자가 되도록 강요하기도 하고 제사하는 집에 쳐들어가서 상을 뒤엎거나 토속신앙을 없애려고 하는 등 횡포를 부린다. 이런 횡포에 분노한 농민들은 이재수를 중심으로 모여서 가톨릭 신자들을 토벌하기로 결심한다. 당황한 가톨릭 신자들은 제주성안으로 들어가서 저항하지만 결국은 무력화 되고, 수백 명이 관덕정 앞에서 살해당한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프랑스 신부가 이 사실을 알려서 프랑스 군함이 내려온다. 하지만 직접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후에 관군이 내려와서 농민들을 진압하고, 주동자들을 압송하여 처형한다. 그리고 보상 차원에서 황사평에 가톨릭 신자들을 묻을 묘지를 제공하였다고 한다. 기억나는 건 이정도 이다. 천주교 측의 입장과 일부 제주도민의 입장이 차이를 보이는 듯하다. 묘지는 전체적으로 잘 관리되는 듯 했는데, 무덤들은 제각각 관리 되고 있는 듯 했다. 안쪽에는 큰 무덤이 있었는데, 제주성에 있다 잡혀 죽은 사람들이라고 들은 것 같다. 교수님이 이들을 순교자라고 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고 하셧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희생자 정도면 모를까.. 어쨌든 잠시 묵념을 하고 묘지를 떠났다. 몇 사람 건너면 아는 사람인 경우가 다반사인 제주도에서 일어난 일이라 더 끔찍하게 느껴졌다. 제주 목사나 프랑스 신부들은 어떤 사람들이기에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새 신자들을 바로 잡지 않은 것일까. 그들의 성품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제주도 사람들의 성향이나 도내 분위기를 잘 파악하지 못한 것 같다. 이들이 탐욕스러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제주도민들 사이에서의 권력 다툼이 커진 것 일지도 모른다. 원래 힘을 갖고 있던 세력에 불만을 품은 다른 세력이 새로 들어온 외국의 종교를 기회로 삼아서 기존의 질서를 바꾸려고 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둘 다거나. 원인이 무엇이든 힘이 생겼다고 횡포를 부린 가톨릭 신자들이나 그에 대한 반발로 수백 명의 같은 도민을 살해하거나 살해하도록 나둔 가담자들이 정상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다들 정상의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 이었을 텐데 분위기에 휩쓸려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버린 것 것이다. 이 일은 각종 이해 관계가 얽혀 있는 복잡한 사건인 것 같다.
다음 장소는 목관아지였다. 교수님이 원래 이곳에는 관아의 터가 있었는데, 도청에서 그 위에 건물을 복원한 것이라고 하셨다. 과거의 터를 보존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예산을 더 받기 위한 욕심에 건물을 복원했고, 그것마저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셨다. 대충 봐도 기와 사이사이에 시멘트가 덩어리져 발라져있는 것에서 과거의 모습을 상상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잠시만 둘러보고 항파두리로 갔다. 관덕정에서 늦게 도착한 분이 합류했는데 차량을 갖고 와서 좀 더 편하게 갈수 있었다. 가는 길에 교수님의 장인분이 자주 가신다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처음 간판을 보고 해산물이 들어간 메뉴 밖에 없을 줄 알았지만 다행히 육개장이 있었다. 음식 맛은 좋았다. 음식점에서 교수님과 교수님이 아는 사이라는 목사님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았는데, 그 분에게서 카리스마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학 때 훈련을 갔을 적에 보았던 군종장교들도 그랬지만, 어렸을 적에 상상한 신에게 의지하는 나약한 이미지는 잘못 된 것 같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의지하는 나약한 모습이 아니라 확실히 존재 하지 않는 것에 의지하려는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한 자신감 있는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이 맞는 듯하다. 밥을 먹고 항몽 유적지에 도착했다. 교수님이 매점에서 같은 차량에 타고 있던 학생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셨는데 나는 크런치바를 골랐다. 한 학생이 내가 버려야할 아이스크림 봉지를 대신 버리겠다고 가져갔는데, 쓰레기통이 없었는지 유적지에서 계속 들고 다니는 것을 보고 조금 미안했다.
유적지는 상당히 잘 관리되어 있었지만 그렇게 볼 것이 없었던 것 같다. 하나의 방으로 구성된 전시관에는 삼별초가 제주도에 내려오기까지의 과정부터 김통정 장군이 자결하고 나중에 고려군이 내려와서 원나라 사람들을 토벌하는 내용이 묘사된 그림들이 벽에 쭉 걸려 있었다. 모르고 처음에 2개의 부분을 거꾸로 읽다가 나중에 알아채고 다시 읽었다. 전시관 가운데에는 유리 상자가 있었는데, 물을 담는데 썼다던 도구의 일부라고 하는 사람 키만 한 나무판자와 깨진 자기 조각이 있었다. 사진을 찍어두었다면 기억하는데 도움이 되었을텐데 안타깝다. 그 나무판자는 설명을 읽었지만 옆에 사진이 없었다면, 물을 담는 도구였다고 상상하지 못했을 것 같다. 전시관이 작아서 금방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계단을 올라가보니 삼별초를 기리기 위한 향로와 비석이 있었다. 비석 뒤에는 전시관에서 본 것과 같은 삼별초의 유래에 대한 내용이 세로로 새겨져 있었다. 교수님이 이 유적지는 박정희 대통령의 명령으로 세워진 것이라고 하셨다. 일제 강점기 등으로 인해 떨어진 국민들의 자긍심을 회복하기 위한 일환으로 전국에 이런 유적지를 세우는 사업이 유행했었다고 한다. 항몽 유적지를 세울 적에 제주도 소설가와 공무원간의 갈등이 있었다는 말도 하셨다. 이 유적지는 원나라에 대항한 장군과 병사들에 대한 이야기만 보여주지 제주도민들이 당한 피해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갈등이었다고 한다. 만 명이 넘는 병사들이 제주도에서 어떻게 지냈을지 상상이 된다. 삼별초의 지도자들은 외부의 지원도 못 받고 있는데다 전투로 불만이 쌓인 부하들에게 어떤 보상도 못해주었기 때문에 통제하지 못했거나 안했을 것이고 그 다음은 거의 뻔한 일 같다. 국가와 학자의 입장은 상반되는 때가 많은 듯하다. 저 당시에는 국민들의 자신감을 회복시키는 것이 경제성장에 더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방적이지 않은 관점으로 박물관을 만든다면 민주화를 촉진 시키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 같다. 교육 수준이 높아진 지금은 이런 유적지가 국민들이 여러 가지 자극을 받고 올바른 판단을 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하여, 지금과는 다르게 바뀔 필요성이 있을 것 같다.
교수님이 가능성 있는 추측이라고 하시면서 삼별초가 일본이 부족사회에서 국가 수준으로 발전하는 것에 큰 기여를 했을 것이라고 하셨다. 삼별초의 수뇌부 중 일부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부족들을 통합했을 것이라는 가설이다. 글을 쓰다 보니 다른 내용들이 계속 기억난다. 항복한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이 일본을 점령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다 태풍을 만나서 거의 전멸하는데 일본인들이 이를 신성한 바람이라고 하여 가미가제라고 하게 되고, 이것이 나중에 자살특공대의 이름이 된다는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또 제주도의 말이 유명해진 것이 원나라 말 사육사들의 사육기술이 전해 내려왔기 때문이라는 이야기 등.. 다른 주제들도 이런 식으로 연관 지어 기억할 수 있다면 더 오랫동안 기억 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는 평화박물관에 갔다. 그곳은 민간인이 운영하는 곳이라고 했다. 전시관에는 일본군의 각종 보급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화승총, 일본 병사와 장교의 군복, 수통, 지금 것과 매우 비슷한 형태의 반합, 구식 대포, 탄띠, 발전기 등 볼 것이 많았다. 일본장교가 우리나라 사람의 목을 베는 사진을 보니까 그 당시 일본의 신문에서 장교들이 조선인 목 베기 시합을 한 내용을 자랑스럽게 기사로 썼었다는 것이 기억났다. 그런 기사가 그 당시 일본 국민들의 자긍심을 높여주었나 보다. 답사한 곳들은 다들 과거의 사람들이 벌인 잔인한 일들에 대해서 떠오르게 하는 것 같다. 홀로 있을 때는 선한 것 같은데 집단을 이루면 그렇게 잔인해 질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