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복지론 - 오아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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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장애인복지론 - 오아시스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영화 를 보고 영화관을 나오면서 내가 제일 처음 느낀 것은
찐한 감동보다는 이유를 정확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이었다.
영화 는 물론 사랑을 소재로 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결코 평 범하지 않은 사랑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처음에 느꼈던 가슴 속 깊이 박히는 충격과 답답함의 원인인 그 평범하지 않은 이유가 단지 장애인을 그 사랑의 주인공으로 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리얼리즘 영화는 사회 속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동시에 고발이라는 성찰이 담겨있기 때문에 보는 이로 하여금 죄의식으로 인한 불쾌감 또는 불편함을 안겨주기도 한다. 는 종두와 공주를 통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을 이야기 한다. 동시에 모순의 아픔을 아우르는 장면들이 여러 군데 장착되어 있어 영화적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보통의 지능과 신체를 가진 사람들에게서 간과되고 찾아볼 수 없는 삶의 아름다움이 사회적으로 소외된 주인공을 통해 표현되면서 우리의 일상성이 갖고 있는 위험함을 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는 우선 장애인과 소외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의 왜곡된 시선을 고발하고 있다. 옆집 아줌마와 아저씨, 공주의 오빠와 올케언니. 경찰관등의 인물들은 신체의 구조가 불편할 뿐 지적인 면에서 다른 어떤 것도 누락된 것이 없는 공주에게 보통 사람이 느낄만한 성욕이나 사랑의 감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옆집 아줌마와 아저씨는 병든 어머니로 인해 집에서 할 수 없는 성행위를 공주가 보고 있는 가운데 천연덕스럽게 벌이고 경찰서 수사관은 종두에게 병신을 보고도 성욕이 일어나느냐고 물어본다. 공주의 오빠와 올케도 처음부터 아예 공주가 사랑의 감정을 느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 하다. 일반인들이 가진 왜곡된 시선은 사랑조차도 강간이라는 죄목으로 변형시키고 종두를 다시 교도소로 보냄으로써 그 변형을 정당화시키는 것이다. 공주에 대한 강간혐의로 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간 종두는 유치장을 빠져나와 공주에게 달려간다. 그리고 공주를 위해 바람 부는 밤이면 오아시스 카펫 위로 흔들리는 그림자로 공주를 겁에 질리게 했던 나뭇가지를 몽땅 잘라버린다. 추운 겨울 밤, 퍼포먼스처럼 벌어진 이 일에 대해 경찰관도 동네 주민들도 종두라는 놈이 저지른 일이기 때문에 왜 이러한 행위를 한 것인지에 대해 이유를 알려고 들지 않는다. 동시에 종두에 대한 화답으로 공주가 동네 떠나갈 듯 큰 소리로 라디오 볼륨을 올렸건만 어느 누구 하나 공주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이처럼 공주와 종두는 우리 사회 내에서 철저히 소외된 인간 군상의 하나로 표현되고 있다.
또한 이 영화는 자신의 물질적 이익을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는 현대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공주의 오빠는 공주가 1급 장애인이라는 것을 이용하여 공주를 허름한 시민아파트에 홀로 남겨둔 채 자신들만 장애인용 아파트로 이사한 후 임신한 아내와 편안하게 지내려 한다. 나중에 동사무소 직원들을 눈속임하기 위해 공주를 데려와 방에 앉히고 마치 공주와 함께 사는 것처럼 위장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나는 더 이상 사랑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에게 공주는 귀찮지만 어쩔 수 없이 최소한으로나마 돌봐야 하는 존재인 동시에 자신들의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심지어 내막은 알지도 못한 채,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은 채 종두와 공주의 정사를 강간으로 규정짓고 이를 이용하여 종두 가족들로부터 돈으로 보상받고자 한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에서 가족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져버리고 오로지 물질적 욕망만을 추구하는 잘못된 현대인의 모습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종두는 모두가 겨울옷을 입고 있는 엄동설한에도 반팔 차림으로 콧물을 흘리고, 여자는 휠체어에 의지해 손바닥만한 하늘을 처음 대하는 사람처럼 바라본다. 오아시스의 홍종두와 한공주는 그렇게 여타의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이었다. 감독은 수선스런 시장 통에, 나사가 널브러진 카센터에, 김칫국물이 누렇게 밴 아파트 벽에 주인공들을 숨겨놓고 기존의 멜로물의 전형을 깨고 있다. 이창동 감독은 종두와 공주의 사랑으로 ‘우리’와 ‘그들’을 나누려 했던 것일까? 오히려 무엇을 하든 소통 불능의 상태가 되는 이 세상에서 우리 모두는 똑같이 공주 같은 의사소통의 장애인이자 종두 같은 사회 부적응 자들이다. 그것이 이창동 감독이 종두와 공주의 사랑을 끝까지 비밀로 남겨놓은 이유는 아닐까. 세상에 들키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세상에 알려져도 끝내는 이해받을 수 없는 것이 사랑의 원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창동 감독은 종두와 공주의 사랑으로 ‘우리’와 ‘그들’을 나누려 했던 것일까? 아니다. 오히려 무엇을 하든 소통 불능의 상태가 되는 이 세상에서 우리 모두는 공주 같은 의사소통의 장애인이자 종두 같은 사회 부적응 자들이다. 그것이 이창동 감독이 종두와 공주의 사랑을 끝까지 비밀로 남겨놓은 이유는 아닐까. 세상에 들키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세상에 알려져도 끝내는 이해받을 수 없는 것이 사랑의 원래 모습이므로. 에서 나는 사랑영화를 보면서도 주인공의 사랑 자리에서 계속해서 배제되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 심지어 그들이 서로의 육체를 통해 처연하게 사랑을 확인할 때도 그것을 지켜봐야만 하는 이방인으로 남겨져 있었다. 공주의 아파트 열쇠는 화분 밑에 숨겨져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문득 가 판도라의 상자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창동 감독은 상자의 문을 따서 온갖 현실의 악취를 다 보여주고는 맨 밑바닥에 있는 사랑이라는 희망만 남겨놓고 상자를 닫아버렸다. 영화를 보다보면 이성복의 시처럼 가슴 위의 것은 다 헛것이라 느낀다. 아주 가난해지지 않는다면 상자의 문을 열 수 없을 것만 같은 불안에 이가 시리다. 물론 가 답변의 나열이 아니라 의문부호로 가득한 영화인 것은 사실이다. 평론은 때로 영화 앞에서 오만을 부리고 싶은 법이지만 이런 영화 앞에선 잠시 겸손해지는 것이 필요하다. 뒤틀린 입에서 간신히 흘러나오는 공주의 말들처럼, 는 외침과 침묵 사이에 존재하는 뒤틀린 속삭임이며, 한없이 간절한 속삭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