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슬라비아의 종교분쟁 코소보 내전 코소보 내전 역사적 배경 코소보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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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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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유고슬라비아의 종교분쟁
“코소보 내전”
Ⅰ. 코소보 내전의 역사적 배경
코소보에서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 사이에 갈등과 내전을 일으킨 비극의 씨앗이 뿌려진 것은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스만 터키는 1389년 현 코소보 언덕에서 세르비아가 중심이 된 기독교 연합군을 대파한 뒤 1878년 러시아·터키 전쟁 때까지 500년 동안 이 지역을 지배했다. 터키인들은 이슬람화된 알바니아인들의 코소보 이주를 장려했고 많은 수의 알바니아인들이 코소보로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코소보서 이때부터 정교도인 세르비아인과 무슬림인 알바니아인들 간의 갈등이 시작됐다. 세르비아인들에게 코소보는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이 지니는 의미와 비슷한 ‘종교적 성지’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원천인 중세 세르비아 왕국의 중심이 이 지역에 있었고, 세르비아 정교회의 첫 번째 교구가 생긴 곳도 바로 코소보다. 세르비아인들에게는 또 오스만 터키 지배의 길을 터줬지만 끝까지 터키에 저항했던 쓰라린 역사의 현장이 바로 코소보인 것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며 점차 코소보 인구의 다수를 점하게 된 알바니아인들은 끊임없이 독립의 길을 추구했다.
코소보 내 알바니아인들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코소보가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에 합병되자 두 차례에 걸쳐 독립 전쟁을 벌였으나 세르비아 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실패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코소보는 티토군의 점령으로, 유고 연방에 편입된다.
티토는 유고 연방을 구성하고 있던 6개 공화국 가운데 맹주 역할을 하던 세르비아의 세력 확대를 억누르는 것이 연방을 존속시키는데 불가피하다고 보고 1970년대 들어 코소보의 자치권을 대폭 확대했다. 그러자 코소보 내 세르비아인들은 점차 많은 수가 본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1961년 코소보 전체 인구의 23.6%를 차지했던 세르비아인은 1981년 13.2%로 줄어들었다. 코소보의 세르비아적인 요소가 점차 퇴색한 것이다.
1980년 5월 티토 사망으로 구심점을 잃은 유고 연방은 각 공화국들 내부에서 민족주의가 자라나기 시작했고, 1989년 붕괴된 공산주의 대체 이념이 된 민족주의는 유고 연방의 분열로 이어진다.
Ⅱ. 코소보 내전의 진행 과정
1. 코소보 내전의 진행 과정
▲ 전 유고 연방과 코소보의 지도
코소보는 알바니아인 80%, 세르비아인 10% 그리고 터키인, 로마인, 보스니아인 등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는 세르비아의 자치주 중 하나이다. 1998년 자치주인 코소보에서 분리 독립을 원하는 알바니아계 반군과 세르비아 연방군 간에 인종갈등이 포함된 참혹한 유혈사태가 벌어졌다.(Kosovo war,1998) 1998년 2월 코소보에서 세르비아 경찰 4명이 코소보 해방군에서 살해된 것을 계기로 세르비아 경찰은 코소보의 알바니아 무장단체에 대한 보복과 진압을 크게 강화했고, 양측의 유혈 충돌은 갈수록 격화됐다. 1999년 3월 프랑스 랑부예에서 열린 평화협상이 결렬되면서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 없이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군에게 세르비아에 대한 공습을 지시했다. 78일간 이어진 공습이 끝나고 양측은 러시아의 중재로 코소보 평화안에 합의했다. 합의안에 따라 세르비아군은 코소보에서 철수했고, 유엔평화유지군이 코소보에 주둔하게 됐다. 내전이 끝났지만 코소보의 지위에 대한 양측의 입장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코소보는 독립을 원했고, 세르비아는 민족의 종교적, 역사적 성지인 코소보만큼은 도저히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결국 나토가 개입함으로써 세르비아 연방군이 축출되었고 코소보는 유엔의 통치하에 머물게 되었으나, 이후에도 이 전쟁으로 인하여 알바니아와 세르비아 간에는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2. 코소보의 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