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문화란 진리를 구하고 끊임없이 진보 향상하려는 인간의 정신적 활동, 또는 그에 따른 정신적, 물질적인 성과 학문, 사상, 예술, 종교, 문학 등 사회 변동과 연관되어 변화되어지는 한 시대를 이해하는 열쇠 역할을 하고 있다. 아득한 때부터 인류의 문화 속에는 종교라고 일컫는 독특한 문화가 있는데, 이 종교문화는 "인간은 문제를 가진 존재인데, 그 문제를 안고 살 수는 없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 문제의 멍에를 벗어나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해답이 있는데, 그 해답을 따라 살면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다."는 한결같은 주장을 담고 있다.
인간은 시초부터 종교를 가지고 살았으며 현재에도 문명인이든, 미개인이든 모두 종교를 가지고 있다. 종교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으나 인간은 근본적으로 종교적 존재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본장에서 그리스의 역사와 문화발전, 지성과 종교는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 알아보고자한다.
본론
고대 세계의 모든 문화들 중에서 서양 사회의 정신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것은 그리스인의 문화로써 인간 업적의 고귀함에 재한 믿음을 그토록 굳건히 지켰던 민족은 없을 정도이며 우주 만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로써 인간을 찬양했으며 사제나 전제 군주의 명령에 복종하기를 거부했고 심지어 자신들이 믿는 신 앞에 굴복하는 것마저도 거부했을 정도로 그들의 태도는 본질적으로 세속적이고 합리적이었다. 그리스의 암흑시대는 마케네문명의 붕괴는 그리스 세계에서는 중대한 재앙으로써, 역사가들이 보통 암흑시대라고 부르는 시대의 도를 예고하는 사건으로 우연히 보존된 것을 제외한 모든 기록들은 사라졌고, 문화는 과서 수세기동안 보다 한층 더 단순한 형태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암흑시대의 정치제도는 대단히 원시적이었다. 각각의 작은 촌락 공동체는 외부의 지배를 받지 않고 독립을 유지했으나, 정치권력은 너무나 빈약해서 국가가 조재했다고 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지배자는 부족의 지도자에 지나지 않았고, 무보수에 법을 제정하거나 수정할 수 없고, 재판을 주재 할 수도 없고, 군사적인 기능과 종교적인 기능만을 가졌을 뿐 여느 시민들처럼 생계를 위해 농토를 경작해야했다. 암흑시대의 사회·경제생활은 놀라울 정도로 단순했고, 전반적 분위기는 귀족적이기는 했지만 엄격한 계급의 구분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육체노동이 천직으로 간주되지도 않았고 게으른 부자도 없었다. 노예라기보다는 귀족에게 봉사하는 예속적 노동자들이 있었고 노예는 주로 여자들로 하녀나 직조공 첩으로 이용되었고, 노예들 중 다수는 포로였으나 비참한 대우를 받지 않았다. 상인 이라는 말조차 없을 정도로 물물 교환만이 거래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암흑시대의 종교개념은 첫째, 자연계의 두렵고 불가사의한 요소를 제거하고 사람들에게 자연에 대한 친밀감을 주는 방식으로 자연을 설명했다. 둘째, 인간 본성을 사로잡는 격렬한 열정을 설명했다. 행운, 장수, 수공업 기술, 풍년 등과 같은 현실적인 이득을 얻고자 했다. 그리스인은 그들의 종교가 자신들을 죄로부터 구해 주거나 영적 축복을 내려 주리라 기대하지 않았고 종교를 행위나 신앙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신의 진노에 대한 아무런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그들이 바라는 것을 믿거나 그들이 선택한 그들 나름의 삶을 영위했다.
그리스 초기 종교의 신들은 인간을 확대시킨 존재에 불과했는데, 사실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이 지배하는 세계 가운데서 안락함을 느끼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다. 오리엔트 종교에 나오는 대부분의 신들과 같은, 인간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있는 전능한 존잰ㄴ 안정감보다 두려움을 자아내는 것으로 그리스인들이 원한 것은 위대한 능력을 지닌 신이 아니라 인간과 대등한 조건으로 교류할 수 있는 신으로써, 그리스의 신들에게는 인간의 유사한 속성인 인간의 신체와, 인간적 연약함과 결점이 부여해서, 신들이 인간과 다른 점은 영원히 살게 해주는 신효와 신주를 먹고 마시며 산다는 사실뿐, 사후에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인가에 대해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예배의 형식적이고 기계적인 성격은 종교에서 예배는 주로희생제로 이루어져있었으나 제물은 속죄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주로 신을 즐겁게 하고 신들로 하여금 인간에게 호의를 베풀도록 설득하기 위해서 바쳐진 것으로 예배자는 적당한 희생물을 바치고 난 다음에 최상의 것을 기원했다. 그리스의 신전은 교회도, 더욱이 종교 집회가 열리는 장소도 아니었으며 그 안에서는 아무런 예식도 행해지지 않고, 신이 때때로 방문해 일시적인 거처로 사용하는 성스러운 장소일 뿐이었다.
도덕과 무관한 종교로써 그리스인의 도덕성은 종교와 깊은 관련이 없었고, 신들은 대체로 정의를 옹호하는 편이었지만, 악과 싸우고 정의가 승리하도록 하는 것이 자신들의 임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고 인간에게 보상을 할당하는 데에도 신들은 도덕성에 대한 고려보다는 그들 자신의 변덕이나 그들에게 제공된 희생 제물에 의해 더 큰 영향을 받았다. 그리스인은 낙관주의로 그들은 인생이란 그 자체로서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확신했고, 죽음을 기쁜 해방으로 기대할 아무런 이유도 알지 못하는 자아의 완성을 위해 노력한 자기 중심적 인간이었다.
도시국가의 발전은 다소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대개 비슷한 정치 발전을 겪었다. 그들의 역사는 왕정으로부터 시작되어 기원전 8세기를 거치는 동안에 왕정은 과정으로 변화했다. 그후 100년이 지난 뒤 대부분의 과두정은 “참주”에 의해 전복되었고 기원전 6세기와 5세기에는 민주정이 수립되거나 또는 일부의 경우 “금권 정치”가 행해졌는데 이는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정도에 따라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발전의 원인을 밝혀내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최초의 변화는 토지 재산이 집중되면서 일어났다. 대토지 소유자들이 더욱 큰 경제력을 갖게 되자 그들은 왕으로부터 권력을 빼앗기로 작정하고 그 권력을 자신들의 지배권을 행사하던 귀족 회의에 넘겨버렸고, 그들은 왕정을 완전히 폐지하였고 그 후 급격한 경제 변화와 정치 혼란이 뒤따르게 되었다. 이러한 발전은 그리스뿐만 아니라 지중해 세계의 다른 많은 지역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정치 발전에 뒤이어 거대한 해외 팽창이 수반되었기 때문이다. 해외 팽창의주요 원인은 농토가 부족해지고 국내 분쟁이 빈발한 데다, 불안정하고 불만스러운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확산되었는데 그리스인은 인구가희소하고 본국과 비슷한 기후와 토양을 가진 여러 지역들을 재빨리 알아냈다.
스파르타의 독특한 발전역사는 일반 도시 국가들의 정치 발전 양상에서 크게 벗어나 있었고 다른 그리스인과 같은 혈통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정의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실패했다. 스파르타 정부는 오늘날의 엘리트 독재와 비슷한 형태로 발전했고 문화적으로도 스파르타는 기원전 6세기 이후로 정체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 원인의 일부는 고립에서 찾을 수 있는데, 북동부와서부가 산맥으로 둘러싸였고 좋은 항구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스파르타인은 외부 세계의 진보적 영향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고, 그 밖에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일반 대중을 도울 중간 계급이 성장하지 못했다. 스파르타 군국주의의 결과는 스파르타인의 생활방식 중에 메세니아 전쟁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거의 없었는데 스파르타인은 그들의 적을 정복하고 약탈하는 동안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노예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멸망하는 그날까지 반란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 속에서 살았는데, 그들이 보수주의의 입장에 서서 변화에 대해 완강하게 저항한 이유는 이러한 두려움에서 찾을 수있다. 어떠한 혁신적 조치도 기존 체계를 치명적으로 약화 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폐쇄성 역시 같은 이유에서 나왔는데 그들은 위험한 사상의유입이 초래할 결과를 두려워한 나머지 여행을 억제했고, 외부 세계와의교역도 금지했고, 사회·경제생활의 모든 부문으로 파급되었다. 스파르타 시민 계급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인생의 대부분을 고귀한 노예로 지내야만 했는데 그들은 가혹한 훈련을 감수해야했고 개인의 생활까지도 희생해야 했다. 스파르타의 유아들은 태어나자마자 건강을 시험받아야 했고, 허약하다고 간주된 유아들은 언덕에 내던져 죽도록 방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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