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과 중립외교정책 광해군 중립외교정책 소개 광해군 중립외교정책 조사 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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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 광해군과 중립외교정책≫
序論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광해군의 무덤은 그저 ‘아담하다’라는 표현할 정도로 왜소하다. 왕위에 올라있었던 인물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무색하다. 봉분과 묘비, 상석, 문인석 한 쌍, 석등 하나가 전부다. 왕실 인물들의 무덤 입구에 보이는 홍살문이나 정자각도 없다. 규모로 치면 어느 높은 벼슬아치의 무덤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광해군은 죽은 뒤에도, 지금까지도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었다.
포학하거나 방탕했던 정도로 치면 광해군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심했던 연산군은 “그냥 쫓겨날 만하니까 쫓겨났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더 이상의 고의적인 격하나 매도를 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광해군만은 달랐다. 쫓겨난 뒤에도 의도적으로 평가절하되고 철저하게 외면되었다. 조선 후기의 역사책이나 개인 문집에서 찾을 수 있는 ‘혼군’이나 ‘폐주’라는 명칭은 예외 없이 광해군을 가리킨다. 죽은 뒤에도 의도적인 격하가 계속되었던 것이다. 혹자는 쫓겨난 노산군, 연산군, 광해군 가운데 광해군이 가장 문제가 많은 임금이라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문제는 달라진다. 죽은 뒤에도 의도적으로 격하를 계속 당했다면 살았을 때의 업적이 만만치 않았다면 것의 반증일 수도 있다. 아니면 광해군을 쫓아내고 정권을 잡은 사람들의 치적이 형편없어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학계에서는 광해군에 대해 새롭게 조명해보자는 꾸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광해군일기』만이 중간수정본과 완성본이 남아 광해군에 대해 새롭게 정립할 수 있는 사료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광해군이 역사에 의도적으로 평가절하되어 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바람 앞에 등불과도 같았던 조선의 상황을 슬기롭게 대처했던 그의 외교능력을 살펴보려 한다.
本論
1. 광해군은 왜 쫓겨났으며, 왜 역사에서 의도적으로 평가절하되어 기록되었나?
인조실록을 살펴보면 광해군이 쫓겨난 이유를 외교와 내정에서 다루고 있다. 먼저 외교에서는 “배은망덕하여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다.”라고 적고 있다. 이 말은 명을 배신하고 후금에게 호의적이었다는 말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당시의 국제정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명, 후금, 조선이 자리 잡고 있는 가운데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후금이 떠올랐다. 1618년 누르하치가 푸순성을 공격하여 함락하자 명은 조선에 파병을 요청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지원군 파병을 미루다 1년이 지난 1619년 조선군을 파견했으나 조선군은 전쟁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중국 번시시 번시현에서 대명지원군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이곳에 ‘박가보’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곳에서 족보를 통해 박씨의 유래를 살펴본 결과 300~400년 전, 즉 조선 중기에 정착했음을 알 수 있었다. 족보에는 “강홍립이 지휘한 조선병사 12,000명 모두가 포로가 되었다. 박씨는 그 후손이다.”라고 적고 있다. 지원군은 전방에 나가 명군이 크게 패하고 돌아오자 후방에 지원군으로 남아있던 12,000명이 바로 투항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광해군은 왜 강홍립을 보낸 것일까? 광해군은 중국어에 능통한 장수를 보내 명나라 장수들과 최후까지 대화를 통해 가능하면 조선은 전쟁에 발을 들여놓지 않게 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에 강홍립을 임명하지 않았을까 한다. 명지대학교 사학과 한명기 교수
광해군이 대명지원군 파병을 달갑지 않게 여긴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패망의 기운이 짙었던 명에 비해 후금은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해가고 있었다. 분조(分朝) 분조(分朝) : 임진왜란 때 임시로 세운 조정. 선조는 요동으로 망명을 하기위해 의주방면으로 가면서 왕세자로 하여금 종묘사직을 나라를 받들어 모시라는 왕명을 내린다. 이에 광해군은 영의정 최흥원을 비롯해 분조에 남은 중신 10명을 이끌고 평안도 맹산양덕, 황해도 곡산을 거쳐 강원도 이천에 자리를 잡고 활발한 활동을 벌이다가, 이 지역에 왜병이 가까워지자 다시 황해도와 평안도 성천을 거쳐 영변에 머물며 분조를 이끌어 나갔다.
활동 중에 명의 지휘관들과의 잦은 접촉을 통해 누루하치의 동향을 전해 듣고 , 평안도와 함경도 일대를 주유하면서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요동 정세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광해군이 명을 배신했다는 비난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임진왜란의 상황을 살펴봐야 한다.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한 이후 선조와 신하들은 명이 조선을 도움으로써 조선 재건의 토대를 만들어 주었으니 이 은혜를 끝까지 갚아야 한다는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 再造之恩 : 이것은 명에 대해 단순히 감사하다거나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차원을 넘어 일종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조선 후기 내내 정치적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