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과 신돈의 개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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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공민왕과 신돈의 개혁정치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공민왕과 신돈의 개혁정치
1.서론
원 간섭기 이후 고려사회는 외세 종속구조가 오랜 기간 지속됨으로써 사회모순이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당시 사회모순은 12세기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던 고려사회 본래의 내적 모순과 원의 간섭으로 말미암은 외적 모순이 중첩된 것이었는데 토지점탈, 수취체제의 문란, 국가 재정난, 민의 궁핍화, 파행적 정치운영 등이 당시 사회모순의 구체적 표현이다. 당시 고려는 지배세력의 토지점탈과 수취체제의 문란으로 국가재정난과 민생문제가 심화되고 있었는데 원의 요구가 추가됨으로써 재정 수요는 늘어난 반면, 토지겸병의 확대로 국가 수조지는 줄어 왕실과 정부는 재정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사회모순의 심화는 모순의 피해자인 백성들의 처지를 더욱 어렵게 하였는데 백성들은 독립적 생활기반을 잃고 국외로 유망하던가, 지배세력의 농장에 투탁하여 예속민으로 전락하였다. 정치운영 또한 국왕이 외세를 배경으로 왕위를 유지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측근정치가 출현함으로써 파행성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왜구의 고려 침입도 몹시 혼란을 가져왔다. 쓰시마 섬에 근거를 둔 왜구는 일찍이 삼국시대 때부터 우리나라 해안을 간간이 침략했으나 여ㆍ원 연합군이 일본 원정에 실패한 뒤로부터는 자주 우리나라와 중국의 해안을 침략하였고 특히 충정왕 때부터 왜구는 100척 이상의 배를 이끌고 자주 고려 해안과 내륙 곳곳에 나타나 약탈과 살인을 일삼았다. 왜구의 침입으로 조세의 해상 운송이 단절 국가재정이 궁핍하게 되었고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민생들은 더 피폐해져 갔다.
이러한 안, 밖으로 혼란한 시기에 왕위에 즉위한 공민왕은 14세기 후반, 원나라와 명나라가 교체되는 대륙정세의 변동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고려의 중흥을 꾀하려고 하였다. 고려의 왕자로 원나라에 보내져 어린 시절을 머나먼 타국인 원나라에서 보내게 된 공민왕은 원나라 노국공주와 결혼해 원나라의 지지를 얻고 왕으로서 고려에 귀국한다.
2.본론
- 공민왕의 개혁정치 -
1351년 공민왕은 원에서 돌아와 그 이듬해 전격적으로 개혁 작업에 돌입한다. 그 첫째로 왕권 강화를 위해 무신정권의 최이가 설치하여 인사행정을 맡아오던 정방을 폐지하였는데 정방은 왕권을 제약하고 신진 사대부의 등장을 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개혁교서를 발표하여 토지와 노비에 관한 제반문제를 해결할 것도 명령하고 각부서의 중요안건을 직접 챙기며 관계와 민생 전반에 대한 통치기반을 확립하려 하였는데 이러한 공민왕의 친정체제 구축작업은 무신정권 이후 거의 이뤄지지 않았던 정치토론장인 서연을 재개함으로써 더욱 구체화되었다. 그는 서연에서 원로와 사대부들이 교대로 경서와 사기, 예법 등을 강의할 것과 전답 및 가옥, 노비와 억울한 죄수 문제를 시급히 해결할 것을 촉구했으며 첨의사와 감찰사를 자신의 눈과 귀로 규정하고 정치의 옳고 그름을 위해 백성들의 이해관계에 대한 기탄없는 보고를 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작업은 조일신의 난(1352.6)으로 한때 위기를 맞기도 한다.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몰락해가는 원나라에 대한 배척운동과 함께 이루어졌다. 1352년 고려 풍속을 회복하기 위해 변발과 호복 등의 몽고 풍속을 금지시켰으며, 1356년에는 원의 연호를 폐지하고 관제를 문종대의 제도에 맞춰 복구하였다. 또한 내정간섭을 일삼아오던 정동행중서성이문소를 철폐하고, 원나라 왕실에 의지하여 권세를 부리던 기황후의 오빠 기철을 숙청했으며, 이자춘의 내조에 힘입어 원나라 복속 이후 1백년간이나 존속해온 쌍성총관부를 폐지하고 원나라에 빼앗겼던 서북면 및 동북면 일대의 영토를 회복했다.
또한 공민왕은 승려 보우의 선사상에 몰입하여 보우를 왕사로 임명하고 그에게 승직에 관한 모든 권한을 대행토록 하는 등 불교의 중흥을 도모 하였는데 이것은 태조의 유지를 받들고 문종 시대의 태평성대를 재현하려는 시도인 동시에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던 유학자 출신 관료들을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