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 감사, 구원받게 하는 믿음의 고백 누가복음 17장 11~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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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설교문 - 감사, 구원받게 하는 믿음의 고백 누가복음 17장 11~19절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제 목: “감사, 구원받게 하는 믿음의 고백”
본 문: 누가복음 17장 11~19절
어느날 하나님께서 두 천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둘은 지상에 내려 가서 오늘 하루 동안 사람들이 하는 기도를 모아서 와라.” 두 천사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하루 종일 사람들의 기도를 모으기 위하여 다녔습니다. 그들은 각각 커다란 바구니를 한 개씩 들고 기도하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지 찾아다녔습니다. 부잣집이든, 오막살이든, 교회건, 학교건 간에 들어가서 사람들의 기도를 마구 담았습니다. 저녁쯤 일을 다 마친 두 천사는 서로의 바구니를 들고 하나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천사를 보니 한 천사의 바구니는 들고 있기 힘들만큼이나 무거워 보였지만 다른 한 천사의 바구니는 들어 있는 것이 얼마 되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벼운 바구니를 든 천사에게 물으셨습니다. “너는 어째서 바구니가 그렇게 가벼워 보이는 것이냐?” 그러자 가벼운 바구니를 든 천사는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이것을 해달라, 저것 좀 해달라’하는 기도만 드리지, ‘이렇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래서 고맙습니다’라고 하는 감사의 기도는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간구’를 담은 저 천사의 바구니는 가득 찼지만 ‘감사’만을 담은 제 바구니는 이렇게...”라고 말끝을 흐리며 한숨을 쉬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신앙은 하나님께 감사하기 보다는 각자의 원하는 것들만을 구하고 복 받기만을 원하는 기복신앙이 팽배해 있습니다. 제가 평신도로서 교회학교 1·2학년 교사로 봉사하던 때였습니다. 당시 저는 1학년의 한 반을 담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한 어린이가 저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왜 어른들은 기도할 때 ‘줘요!줘요!줘요!’라고 하면서 기도해요?” 갑작스러운 어린이의 질문을 저는 알아 듣지 못해서 어리둥절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저는 그 질문의 의미를 깨닫고 부끄러움을 느끼고 당황했습니다. 그 어린이의 질문은 성도들이 기도할 때 “주여!주여!주여!”라는 흔히 말하는 주여 삼창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여 삼창이 그 어린이가 듣기에는 “줘요!줘요!줘요!”라는 소리로 들렸던 것이었습니다. 그 어린이가 가만히 어른들의 기도 내용을 들으니 어른들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계속해서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어린이들 보기에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늘 달라고만 하십니까? 아니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은혜들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은혜에 감사하기 보다는 우리에게 없는 다른 것들을 찾아 기도하고 응답받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응답이 늦어지거나 본인의 생각과 다른 결과가 되면 금방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합니다. 또 어떤 성도들은 본인이 원했던 기도응답이 이루어지지 않자 하나님께 시험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성경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편 50:23)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은 감사의 고백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본문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교훈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 하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오느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가시다가 한 마을을 지나게 되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열 명의 나병환자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나병을 죄에 대한 형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병환자들을 성 밖으로 격리시켰습니다. 따라서 나병환자들은 가정과 사회에서 소외된 채 성 밖에서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나병을 고침받는 것이 얼마나 큰 소원이었겠습니까. 아마도 그들의 평생의 간절한 소원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나병환자들은 성한 사람이 지나가는 것이 보이면 먼 데서부터 입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쳐서 접근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께서 저 멀리 지나가고 계셨습니다. 저 멀리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본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마땅히 “부정하다!”라고 외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놀라운 능력을 행하시고 병을 고쳐 주신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믿음을 가지고 간절히 도움을 청한 것입니다. 그들은 나병 때문에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나병을 고침받기 위한 마음이 너무나 간절했기에 그들은 몸 속에 있는 힘을 다 짜내어서 간절히 외쳤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간절히 자비를 구하는 이들을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그분은 그들에게 크신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간절히 도움을 청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도움을 구하는 간절한 외침을 들으실 때 움직이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 행위의 의로움들을 내세울 때가 아니라, 우리의 비참한 처지를 깨닫고 간절히 도움을 요청할 때 움직이십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선행을 하거나 ‘이것만 들어주시면 앞으로 더 잘하겠습니다.’ 라는 약속을 하면 하나님께서 복주시고 기도 응답을 해주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을 깨달아야만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주고자 하시는 기쁨을 깨닫고 또한 그 기쁨을 참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에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참으로 우리에 대한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게 되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겸손한 자세로 “예수님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간절히 외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려면, 우리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바로 알고 인정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겸손한 자세로 그분의 도움을 간절히 구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절한 간구를 무시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정직한 고백과 참된 회개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여 하나님이 의인만을 사랑하신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결점을 거룩해 보이는 겉모습으로 위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이 혹시나 드러나면 어쩌나 하고 더욱더 숨기려고 합니다. 하나님께는 물론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그것을 숨기려고 합니다. 그리고 흡사 자신이 진정한 의인인 것처럼 하나님을 속이고 자기 자신을 속이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신이 의인인 것 같은 착각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 3절부터 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그러한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께서 책망하셨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이러한 위선적인 모습이 다만 그들만의 모습인가요? 우리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부끄러움 없이 간절히 도움을 구하며 기도할 때 결코 우리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만일 우리 자신에게 죄가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마음에 있는 그 죄를 인정하고 자백해야 합니다. 이렇게 정직한 자세로 하나님께 간절히 도움을 구하며 기도하면, 그분은 우리들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이며, 이 은혜를 바로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그분의 도움을 간절히 구하며 기도하게 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비를 구하는 열명의 나병환자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가 아무리 심각하고, 또 고질적인 것이라고 해도 그분의 용서를 구하면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요한 일서 1장 9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진실한 죄의 자백을 들어주십니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 주시겠다고 성경의 말씀들을 통해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간절한 외침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열명의 나병환자들에게는 믿음이 요구되는 일이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나병이 다 나은 자들은 제사장에게 확인을 받고 제물을 드린 후에야 사회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레위기 14:1-32). 그런데 예수님은 아직 나병 상태에 있는 열 명에게 그 몸을 제사장에게 가서 보일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병환자들은 모험을 해야 했습니다. 만일 가는 도중에 나병이 낫지 않는다면 그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나병환자가 길에 돌아다닐 경우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가다가 나병이 치유되는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결과 그들은 나병이 치유되는 큰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에서 그쳤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나병이 치유되는 은혜를 입었지만 그들은 예수님께 찾아가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단 한명 사마리아인이었던 나병환자만이 가다가 나병이 치유된 것을 보고는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돌아온 한 사람의 나병환자는 유대인이 아닌 사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