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컨설팅 전문회사인 인터브랜드는 해마다 전 세계 수백 개 브랜드의 자산 가치를 평가하여 100개의 베스트 브랜드를 발표한다. 인터브랜드의 리스트에 따르면 코카콜라는 20년 가까이 1위를 놓쳐본 적이 없다. 하루에 6억 잔 이상 소비된다는 코카콜라가 이토록 오랜 기간 세계 최고 브랜드가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자기들이 소유했다고 말할 정도로 강력한 아이덴티티 컬러인 붉은색, 그리고 읽히기보다 이미지로 인식되는 로고가 코카콜라의 브랜드를 만드는 중요한 요소임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코카콜라는 제약사인 존 펨버턴이 두통약으로서 수차례 개발과 실패를 거듭한 끝에 만든 음료수다. 1886년 펨버턴은 연속되는 실패 뒤 여러 가지 혼합물에 탄산수를 넣어 완성한 음료의 시음회를 자신의 뒷마당에서 연다. 이 시음회에서 특별한 평가를 받았고 약국에 납품을 시작하게 된다. 펨버턴의 경리 사원이었던 프랭크 로빈슨은 이 음료수에 ‘코카콜라’ 라는 이름을 지었을 뿐만 아니라 커다란 C자가 돋보이는 흘림체의 로고까지 디자인해주었다. 로빈슨이 디자인한 로고는 1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변함없이 쓰이고 있다.
펨버턴으로부터 사업권을 사들인 아사 캔들러는 유능한 사업가로서 이 독특한 음료수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웠다. 1915년에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간 콘투어 병이 생산되기 시작했고,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대회부터 올림픽 후원을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 뒤에는 유명한 산타클로스 광고 캠페인을 펼쳤다. 경리 사원이 만든 이름과 디자인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브랜드가 되었다 . http://jesignwc.egloos.com/
펨버턴은 자신의 발명이 얼마나 큰 여파를 몰고 올지 결코 깨닫지 못했다. 불행하게도 그는 주어진 기회조차 잘 활용하지 못했다. 1887년에 금주법이 폐지되자 펨버턴은 아들에게 코카콜라 생산을 맡기고 다시 프렌치와인코카 생산을 재개했다. 이는 자신이 발명한 20세기 미국 문화의 일면이 되리라고는 조금도 짐작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이었다. 쉰여섯 살의 펨버턴이 건강 문제로 회사에서 물러나면서 그는 초창기 동업자 중 한 사람인 아사 G, 캔들러를 사장으로 앉혔다. 펨버턴은 이미 중병에 걸려 있었고 목숨을 갉아먹는 암과 오랫동안 싸울 수 없으리라고 예감했다. 그래서 자신의 지분을 넘기기로 결심했다. 1887년부터 1888년 3월 사이에 그는 자기 소유의 약국에서 파는 매상 전체와 코카콜라 1갤런당 5센트의 로열티를 받는 조건으로 코카콜라 브랜드에 대한 모든 권리를 넘겼다. 존 펨버턴은 1888년 8월 6일에 쉰일곱 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장례식이 있던 날 애틀랜타의 모든 상점들이 커튼을 내려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날은 도시 전체에서 단 한 방울의 코카콜라도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로부터 1년 캔들러는 코카콜라 사업의 총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대단히 빠르게 애틀랜타와 미국 전역에서 가장 큰 부자이자 전 세계 최고의 갑부들 중 한 사람으로 떠올랐다. https://plus.google.com/111084245324146090581
코카콜라는 미국의 탄산음료 브랜드로, 제품인 코카콜라 음료는 코카나뭇잎과 콜라(Cola) 열매로 만들어졌다. 1886년 약제사였던 존 펨버턴 박사는 코카 잎 추출물, 콜라나무 열매 그리고 시럽 등을 혼합하여 두뇌강장제를 개발했다. 존 펨버턴 박사는 미국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 있는 야콥 약국에 이 음료를 납품하기 시작했고, 당시 약국의 경리사원이었던 프랭크 로빈슨은 두 개의 ‘C’자를 매치해 ‘코카콜라’ 라고 이름 붙였다. 이후 코카콜라는 사업가인 아사 캔들러가 대중화를 시켰는데, 코카콜라는 오늘날 미국 문화의 상징이자 탄산음료의 대명사가 되었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ipracafe&logNo=220026092261&redirect=Dlog&widgetTypeCall=true
코카콜라 개발자인 존 펨버튼은 1831년에 조지아주 녹스빌에서 태어났다. 그는 정식으로 의학 교육을 받진 않았지만 여러 가지 재료를 혼합해 약품을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1870년 존 펨버턴은 애틀랜타에 와서 약국을 운영하기 시작했고 각종 조제약으로 명성을 얻었다. 펨버턴 박사는 코카콜라 시럽을 생산해 소다수 음료수를 개발했다. 이 음료는 야곱 약국 소다수 판매대에 진열되어 한 잔당 5센트로 판매되었다. 존 펨버턴은 광고 전단과 상품 교환권에 약 74달러를 투자했지만, 코카콜라는 하루 평균 6잔이 판매되었고 첫 해 총 수입은 50달러에 불과했다. 코카콜라를 대중화시킨 것은 애틀랜타의 사업가인 아사 캔들러였다. 존 펨버턴은 생전에 이 음료의 성장 가능성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는 1888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여러 파트너들에게 사업지분을 쪼개 팔았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아사 캔들러였다. 탁월한 사업감각을 갖고 있던 아사 캔들러는 1892년에 2천 300달러(당시, 약 122만 원)에 코카콜라 사업의 소유권을 확보했다. 그는 존 펨버턴의 전 동업자였던 프랭크 로빈슨과 함께 1892년에 ‘코카콜라 컴퍼니’를 설립했다.
회사 설립 이후, 광고 및 홍보에 대한 중요성을 간파하고 있던 아사 캔들러는 수천 개의 무료 시음 쿠폰을 발행하고, 코카-콜라 로고가 새겨진 달력, 시계 등 다양한 기념품을 만들어 적극적인 프로모션을 진행했다. 이런 적극적인 프로모션을 통해 코카-콜라의 수요는 애들랜타 지역 밖에서도 지속적으로 올라갔고, 아사 캔틀러는 1893년에 코카-콜라 상표권을 미국 특허청에 등록하여 브랜드를 보호하고자 했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eechland&logNo=130161681641
1894년 미시시피주의 사업자인 조셉 비덴한는 미시시피 내에서 코카콜라에 대한 수요가 꾸준히 늘어나는 것을 보고, 코카콜라 컴퍼니로부터 코카콜라 원액을 대량 사들여 미시시피 주 내에서 독점적으로 판매하겠다고 제안했다. 당시 코카콜라의 수요는 이미 코카콜라 컴퍼니가 생산 가능한 공급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에 아사 캔들러는 이를 받아들였다.
아사 캔들러는 이를 정례화하여 보틀링 시스템을 고안했다. 보틀링 시스템은 지역별로 보틀러(병 제조업자)와의 계약을 통해 보틀러에게 그 지역 내에 코카콜라 독점 판매권을 부여하는 것으로, 이들은 코카콜라 컴퍼니로부터 대량의 원액을 납품 받아 자신들이 제조한 병에 원액을 넣어 판매한다. 1895년 코카콜라 컴퍼니는 시카고와 댈러스, 로스앤젤레스에 코카콜라 원액 제조 공장을 설립했다. 1899년까지 채터누가주의 사업가인 존 럽턴, 테네시주의 사업가인 벤자민 토마스그리고 미시시피주의 사업가 조셉 화이트헤드가 코카-콜라의 보틀러가 되었다. 이후 각 지역별로 보틀러들이 합류하면서 오늘날 코카콜라의 보틀링 비즈니스 시스템의 시초가 완성됐다. http://philgo.com/?1269810554
코카콜라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