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육학자의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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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우리 교육학자의 욕망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 ‘우리’ 교육학자 = ‘기누’(당신+그+나) 교육학자 = 학교교육학자 6장의 제목인 ‘우리’교육학자는 3장에서 3조가 발표한 내용 중 왜상적 독해의 ‘이론적 독해’ 과정의 또 다른 해석으로 볼 수 있다. ‘우리(니넨-주체성을 지닌 우리로써 ’나‘의 의도가 개입되지 않은 우리)’ 교육학자에서 ‘우리(기누-주체성을 상실한 우리로써 ’나‘의 의도가 다분히 개입된 우리)’ 교육학자로의 전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6장의 ‘우리’교육학자는 기누의 의미로 해석해 볼 때, 교육학자 자신의 의도가 들어간 주체상실의 ‘우리’로 해석할 수 있고, 이것을 우리는 학교학자로 간주한다.
Ⅰ. 학교학자의 특징
1. 학교학자는 전문가이자 예언가이다.
: 그들은 학교파시즘 학교파시즘은 학교권력이자 힘을 의미한다. 학교파시즘 속에는 개인의 자아실현을 도와주기 위한 교육 기제와 자기포기를 용이하도록 만드는 두 가지 기제가 함께 작동한다. 이것은 복합사고와 이중구속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주입하고 감호기관으로서 ‘인간행동의 능동적 변화’를 강조한다. 학교파시즘은 학교교육 작용이 마치 삶의 모든 질을 높일 수 있다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의 친위대이며, 학교전문가로서 학교 신봉자들이다.
전문가는 직업적으로 고도의 전문적 식견을 드러내 보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전문가일수록 자기들이 하는 일에 더욱 자긍심을 갖는다. 양보는 전문성을 포기하는 일이고, 때문에 그들은 과학적 이론화나 객관화를 통해 그들의 이론을 정당화시킨다. 더불어 이것은 그들의 학교당위성을 숫자적으로 증명해 주는 객관적 자료가 된다. 그들은 학교를 위해서 연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학교에 관해서 연구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조형적 사고 조형적 사고는 무엇인가를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하나의 기호가 보여주는 형태나 형식이 무슨 의미를 어떻게 만드는지에 대한 관점만을 제시한다. 따라서 조형적 사고는 교육과 학교가 가진 본질적인 의미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이 아닌 교육과 학교 그 자체에 관한 의미와 형식만을 논하도록 유도한다. 학교학자들은 이러한 사고를 통해 교묘하게 자신들이 교육을 논하고 있도록 보이게 눈속임한다.
를 통해 학교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학교전문가이다. 그들은 이미 결론이 나와 있는 것을 예언한답시고 학교를 진단하고 치료한다. 그들은 단지 국가권력 아래에서 ‘온순한 인간(Homo Docilis)를 양성하는데 이바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국가권력은 시민들의 간접적인 간섭과 통제를 위해 전문가를 필요로 하게 된다.
2. 학교학자는 연금술사처럼 연구한다.
: 학교학자들은 이 시대 이 교육계를 바꾸어보려는 연금술사의 꿈을 꾸고 있다. 그들은 그 누구든지 간에 학교라는 매체를 통해 자아실현 할 수 있는 인간으로 만들어 낼 수 있고, 학교교육으로 인간행동의 변화를 혁명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확신으로 오늘도 연구하고 또 연구한다. 학교학자들은 때로는 없는 것도 있게, 죽은 것도 살려놓게 만들기도 하며 마치 연금술사처럼 연구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복합적 사고 복합적 사고는 자기 마음에 두 가지의 상반된 신념을 동시에 간직하고 두 가지 모두 받아들이게 하는 능력으로써 학교학자들은 이것을 주입시키는 방법으로 학습-이해-수용의 세뇌를 감행한다.
를 하도록 세뇌하는 ‘당의 지식인’(조지 오웰, )이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연금술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으면서 연금술의 비밀을 얻어 자신의 삶 속에서 철학의 돌을 구하고자하는 자같이 교육의 본질은 잊고 학교교육을 논하여 자신들의 분별없는 욕망을 채우는 자들이다. 그들은 교과서가 교육을 대신하고, 교사가 배움을 대신하는 것으로 만들어놓는 데는 성공했으나 교육을 인간친화적인 것으로 만들어 가는 데는 별로 이뤄낸 것이 없다. 그들은 인간에 대한 이해, 인간의 존엄성을 뒤로한 채 치유가 아닌 치료로만 학교교육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있다. 학교학자들은 이미 ‘학교’를 포기했다. 이제 학교는 그들에게는 하나의 기자제일 뿐이다.
3. 결국, 학교학자는 의 주인공 아Q이다.
: 학교학자들은 참교육을 논하는 교육전문가도, 삶의 가치를 변화시키는 연금술사도 아닌 급속한 사회변화에 허망한 자세로 대처하는 아Q이다. 아Q가 혼돈의 중국을 살아가면서 발휘했던 처세술인 정신승리법은 교육계 쟁점과 문제를 접하는 한국의 교육학자들의 처세술과 엇비슷하다. 교육적인 전문성을 시험하는 사회문제들이나 정책들이 그들 학자를 향해 쟁점으로 제기되어도 그저 그것은 전문가들이 관여해야 될 일이 아닌 양 치부해 버리거나, 혹은 학자의 본분은 사회정치적 논쟁임을 끼이지 않고 그 대신 연구에만 몰두해야 한다는 식으로 자신들의 처지를 위로하는 태도가 바로 아Q의 정신승리법과 비슷하다는 뜻이다. 그들은 그들의 삶의 터전이자 젖줄이며 밥줄인 학교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들의 이득을 챙기기 위해 처세술을 부리고 있는 자들이다.
Ⅱ. 학교학자의 욕망과 국가과외와의 관계
학교학자들은 교육학이 무엇이냐에 대한 본질적인 논의보다는 교육학이 무엇으로 구성되어야 하느냐에 대한 방법론적 논의에 더 민감해 왔다. 그들은 교육을 위해서 연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교육에 관해서 연구하는 조형적 작업을 통해 학교존재를 확인하고자하는 결과물들만 잔뜩 내놓았다. 왜냐하면 학교는 그들의 밥줄이자 젖줄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학교의 정당성을 부여해야만 했다. 학교가 살아야 그들도 산다. 이러한 학교학자의 욕망이 만들어낸 기자재가 결국은 국가과외이다. 본질이 빠진 방법론적 대안으로써의 국가과외는 우리교육을 위험하게 만든다.
Ⅲ. 우리의 논의점
학교학자들은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학교학자들의 진짜 역할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