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말 교육적 상황과 선 초교육의 과제 김대용 논문 비평

 1  여말 교육적 상황과 선 초교육의 과제 김대용 논문 비평-1
 2  여말 교육적 상황과 선 초교육의 과제 김대용 논문 비평-2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여말 교육적 상황과 선 초교육의 과제 김대용 논문 비평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이 논문은 여말 선초 역사적 전환기로 새로운 지배체제의 안정과 강화라는 당시의 사회적 과제를 교육으로 풀어내기 위한 노력을 연구하고 있다. 예컨대, 교육이 사회변화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교육을 살펴보는 것은 이 시기를 올바로 이해하는 하나의 지름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 논문의 요지
여말 신진사대부는 학교를 유학을 진흥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제도적 장치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학교만으로는 어려움을 있으며 교육의 외연을 학교 밖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었다. 이 논문에서는 역사적 전환기에서 여말의 교육적 상황을 살펴보고, 관학교육기관인 성균관, 향교, 그리고 학교 외 교육으로 나누어 선초의 교육과 그 과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선초 교육제도를 정비해야 했던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여말의 교육적 상황을 살펴보았다. 성종 때에 정비된 관학교육은 재정상의 어려움과 교관의 무능, 문종 때 최충이 세운 문헌공도 등 사학이 발달함에 따라 위축되었다. 뿐 만 아니라 사학의 설립자들은 모두 문종 전후의 문관들로서 학식과 명망이 높고, 대체로 지공거를 역임한 실력자들이었다. 사학은 과거를 중시하는 당시 경향에 따라 과거준비학교 내지 관리양성소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귀족들은 관학보다 사학을 선호하였으며, 그 결과 관학은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부진을 면하지 못하고 있었던 관학은 여말 개혁정치가 시행되고, 새로운 정치세력이었던 신진사대부가 대두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충선왕이 정치고문기구인 사림원을 설치(1298년)하여 권문세족을 제거하고, 과거시험을 통해 지방 출신의 신진사대부들을 등용한 것 등이 그것이다.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서는 권문세족이 관직 진출의 근거로 활용하고 있었던 사학 대신 관학을 정비할 필요가 있었으며, 신진사대부들도 관학을 통해 자신들의 세력을 집결할 필요가 있었다.
둘째, 조선 초기 교육을 통한 새로운 지배체제의 안정과 강화는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유학을 보급하고 확산하는 것, 인재를 양성하고, 관료로 선발하는 것, 민을 지배체제 순응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제들을 달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배층은 교육제도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최고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은 불교육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유학을 사회 전반에 확산시킬 책무를 맡으며, 연구와 보급, 지배이념으로 무장된 관료 양성의 기능을 하였다. 향교는 ‘입읍일교’(一邑一校)의 원칙에 따라 모든 군현에 설립된 유일한 관학으로서 민을 대상으로 지배이념에 근거한 도덕과 윤리규범을 내면화하여 지배체제에 자발적으로 순응할 수 있는 의식을 형성하였다.
향교만으로 교화를 효과적으로 성취하기 어렵기 때문에 학교 외 교육에서는 민에게 오륜의 실천을 권장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게 되었다. 정표(旌表)는 오륜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신분 상승의 혜택을 주고, 서제와 국역을 면제하고, 쌀과 콩 등을 하사하는 경제적 포상과 정문(旌門)과 정려(旌閭) 설립 등 명예적 포상을 하는 제도이다. 뿐 만 아니라 인간의 삶에서 법으로 통제하겠다는 지배층의 강력한 의지도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세종이 만든 훈민정음의 목적 가운데 하나도 민에게 사회체제에 순응하게 만들기 위한 정책이 ‘훈민’이었으며, 훈민을 위한 문자가 바로 훈민정음이었던 것이다.
3. 논의할 것 몇 가지
첫째, 필자는 선초 교육의 중요한 과제로 인재의 양성과 관료 선발로 보았으며, 학교교육과 과거제가 직결되지 않는 점을 한계로 보았다.
그러나 성균관 유생들에게 과거에 대한 여러 가지 특권을 부여한 점, 식년 문과 초시에는 향시와 한성시, 그리고 관시(館試)가 있었는데, 관시에는 대체로 성균관 유생들만이 응시할 수 있었고, 왕이 성균관을 방문한 다음 보이는 알성시에 응시할 수 있는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 또한 성균관 유생들은 지방 유생들에 비해 선초 자주 시행된 부정기 시험인 별시에 응시하기가 훨씬 수월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성균관을 거치지 않고서는 문과에 급제하기 어려웠다. 필자가 말하는 학교교육과 과거제가 직결되지 않는 이유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
둘째, 새로운 지배체제의 안정과 강화를 위해 유학을 보급하고 확산하는 것, 인재를 양성하고, 관료로 선발하는 것, 민을 지배체제 순응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교육”으로 볼 수 있는가 이다. 이데올로기적인 신념에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게 만드는 것은 교화이므로 교육체제를 정비하는 흐름정도로 파악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