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이후의 방송
그리고 이날 오전 9시 30분부터 전남대학교 정문에서 캠퍼스에 진주한 7공수여단(이하 7공수로 표현)이 대학에 들어가려는 대학생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기 시작함으로써 518민중항쟁은 막이 올랐다. 대학진입에 실패한 대학생들이 시내 중심지로 진출하던 오전 상황만 놓고 볼 때, 며칠 내에 이처럼 엄청난 비극이 찾아오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이날 오후 4시를 전후해 7공수가 시내에 배치되어 진압을 시작하고, 19일에는 11공수, 20일에는 3공수가 축차 투입되면서 그 비극은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18일 오후 윤흥정 전남북계엄분소장은 광주지역 통행금지 시간을 밤 9시부터 새벽 4시까지로 연장하는 전남북계엄분소 공고 제4호를 발표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이날 저녁이 되면서 상상을 초월한 공수부대의 과격한 진압소식을 알고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일자 20일자 석간신문(지방신문)에 이같은 사실이 게재되지 않은 채 배포되면서 시민들의 언론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지방의 TV라디오방송 역시 계엄군의 잔학상은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물론 검열당국이 가차없이 삭제했기 때문이었다.
2. 518 당시 중앙언론의 보도
서울에서 발행되는 신문(이하 통칭되는 ‘중앙지’로 칭함)들은 5월 21일(서울 석간발행시간 기준)부터 ‘광주사태’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 보도는 언론사 자체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계엄사령부가 ‘광주사태’를 공식 언급하면서부터였다. 즉, 신문사 자체적으로 보도한 것이 아니라 계엄사령부가 광주사태를 공식화하면서 계엄사령부의 발표를 인용하면서 뒤따라 보도에 들어간 것이다. 중앙지들은 광주에 주재기자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시외전화가 중단된 21일 이전에도 광주의 심각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공수부대의 과격진압행동에 대해서는 전혀 활자화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는 나흘전인 18일 비상계엄 전국확대로 신군부의 실세들이 전면에 드러나므로써 몸을 움츠릴 수 밖에 없었던데다 검열을 통해 광주사태의 보도를 통제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중앙지들은 서울에서 광주에 기자들을 파견하여 주재기자들과 취재를 함께 하도록 했다. 그러나 21일까지의 신문에 광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심각한 상황에 대해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자 시위군중들은 취재기자들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국내 기자들은 자신의 신분을 내놓고 취재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시민공동체기간 동안에도 외신기자들은 수습대책위원회가 열리는 전남도청을 쉽게 출입할 수 있었으나 국내기자들에게는 부끄럽게도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광주현지에는 광주사태를 보도하기 시작한 22일자 이후의 중앙지들이 배달되지 않았다. 따라서 시민들이 중앙지 보도내용을 직접 접할 수 있게 된 것은 중앙지가 광주에 배달되기 시작한 6월 2일 이후의 일이었다.
3. 518 당시 중앙언론의 보도가 끼친 영향
중앙지들은 광주사태를 거의‘ 폭도들의 광란’으로 고착화시켰다. 중앙지는 계엄사의 발표를 그대로 인용해 사태 초기의 피해자를 축소발표했고, 이어 시민폭발의 원인인 공수부대의 과잉진압문제를 회피한 채 복면과 무장, 강도, 시민들의 불안, 간첩과 연계성 등을 집중적으로 다룸으로써 국민들에게 사태를 오도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사태가 마무리된 뒤에도 시민을 ‘적’으로 간주한 공수부대 진압방법의 문제점이나 계엄군의 무리한 작전계획, 수준낮은 선무작전 등에 대해서도 침묵함으로써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국민들이 ‘진실’을 믿지 않게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됐다.
취재과정에서 서울에서 파견된 기자들이나 광주에 주재한 기자들의 고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왜곡된 보도 때문에 시위대나 시민군으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심지어는 수습대책위원회가 열리는 전남 도청의 출입을 제지당했다. 외신기자들에게는 차량이 제공되는 등 지나치게 우호적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대조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들은 가능한 방법을 동원해 열성적으로 취재하고 기사를 송고했으나, 검열 때문에 지면에 반영되는 것은 극히 일부였다.
4. 매체의 사실성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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