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주화운동 발발 원인
이러한 계엄 확대 조치는 단순한 지역적 확대라는 의미를 떠나 그 때까지의 민주화 열기, 대다수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절실한 요구를 전면으로 부정하는 처사였다고 할 수 있다.
5월 18일
이에 따라 다음 날인 18일 오전 9시 30분쯤 전남대 교문에 학생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군인들은 정문에서 경비를 서면서 휴교령이 내려졌다는 이유로 출입을 금지시켰다. 그러자 학생들은 ‘전두환 물러가라’, ‘비상 계엄령 철폐하라’, ‘김대중 석방하라’, ‘휴교령 철폐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에 들어갔다. 이러한 시위를 진압하던 공수부대원들은 학생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학생들은 이들이 휘두른 곤봉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갔다. 학생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광주역 광장에 모여서 전남대생 약 200명이 모여 행진하며 시위를 계속했다. 이들은 곧 금남로로 이동하여 카톨릭센터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였다. 당시 한일은행 앞에서도 시위대 600여명이 집결해 있었는데 이들도 가톨릭센터로 진출하여 합류하였다. 점차 시위대에 시민들이 참여하면서 이들은 유동 3거리 쪽으로 이동했다. 시민들은 도청 앞, 금남로 일대에서 1,500여명, 충장로 일대에 1,600여명이 모여서 시위를 시작했다. 그리고 오후 4시, 유동 3거리에 등장한 공수부대들은 1분간 귀가를 종용하는 방송을 한 후, 진압작전을 전개했다. 이른바 ‘화려한 휴가’라는 작전 명령이 하달되어 대살상작전이 전개된 것이다. 지휘관은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은 전원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따라 시위대는 물론이고 일반 시민들까지도 단지 이 거리를 지나갔다는 이유만으로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폭행당해야했다. 이후에도 노동청 앞 등의 시가지에서 2000여명이 산발적으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5월 19일
다음 날인 19일 아침 9시가 지나자 금남로에는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경찰 병력은 적극적으로 진압하려 하지 않고 스피커를 통해 해산을 종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중들은 전혀 해산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화염병 등으로 무장을 하고 나섰다. 그리고 경찰과 학생들간에 일대 투석전이 벌어졌다. 그러자 도청 안에 있던 공수부대원들이 금남로로 들어서서 전날보다 더욱 심한 진압작전을 펼쳤다. 공수부대원들은 시민만 폭행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학생들을 실어 나르고 부상당한 시민을 병원으로 운반해 준다는 이유로 시내버스나 택시 운전기사들도 폭행했다. 오후에는 시민들이 흥분하여 차를 방화하기도 하고 공수부대원들도 시민들을 과격하게 진압하기 시작했다. 군용 헬리콥터는 계속 해산을 종용하고 있었지만 시민들은 해산하지 않고 지금까지의 태도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대항하기에 나섰다. 이틀동안의 공수부대의 만행이 계속되자 시내의 고교생들도 이러한 시위에 참여하려고 하였으나 경찰과 군인에 의해 저지당했다. 이에 당시 중앙여고생 1400명, 광주일고생 2천명 등은 교내 운동장에서 집결하여 수업을 거부하고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오후 3시쯤에는 시내 기관장과 유지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대책을 논의한 끝에 이러한 상황은 공수부대의 강경 진압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고 결론짓고 강경 진압을 완화해 주도록 계엄당국에 건의하기로 합의한 후 이를 전달하였으나 묵살되고 말았다. 시내에서는 유인물이 뿌려지는 등 계속적으로 시위가 진행되고 있었다. 시위군중들은 자체 무장을 보다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오후 5시가 넘어서는 금남로에서 시위군중 1,500~2,000여명이 재집결하여 시위를 계속했다.
5월20일, 21일
시위 3일째인 20일 아침 8시에는 고등학교 임시 휴교 조치가 내려졌다. 이것은 19일 고등학교의 심상치 않았던 분위기 때문이었다. 공수부대와 시민들의 공방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18,19일이 공수부대원의 일방적인 도전이었다면 20일부터는 응전이 시작된 것이다. 오전에는 소강상태였으나 오후가 되면서 광주 시가지는 다시 팽팽한 대치국면으로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시장의 상인들까지 철시하고 시위에 나서기 시작하여 그 인파는 10만여명이 넘었다. 금남로에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으며, 각종 차량들도 모여들기 시작했다. 공수부대의 만행에 격분한 택시기사들이 200여대의 차량시위를 감행함으로써 소강상태에 빠져있던 시위군중들의 전의에 불을 질렀다. 이것은 전날 택시나 버스 운전기사들을 공수부대원들의 폭행에 대한 보복이었다. 시위대들은 금남로 뿐만 아니라 노동청, 충장로 방면에도 있었다. 이들은 도청 광장으로 진출하려고 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은 이날 오후부터 울려 퍼지던 ‘전옥주(본명 전춘심)’의 목소리였다. 전옥주의 목소리는 이제까지 산발적으로 투쟁해오던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역할을 해내기도 했다.
시위는 밤까지 계속되었다. 이날 밤에는 전남 민주통일을 위한 국민연합회, 전남 민주청년연합회, 전남 민주구국학생총연맹의 명의로 선언문 총 8개항의 요구사항이 들어있다. 최규하 정부 타도, 전두환 처단, 계엄령 철폐, 휴교령 철폐 등의 내용에서는 지금까지 외쳐온 구호가 대부분이지만 ‘정부와 언론은 전남인과 경상인의 지역감정을 왜곡보도, 허위조작하지 말라.’는 대목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이 발표되었다. 밤 9시 50분경, 시위대는 광주 MBC 건물을 방화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당시 7시뉴스에 계엄당국이 발표한 거짓투성이의 보도문에 대해 분개한 군중들의 보복이었다. 같은 이유로 다음날 새벽 4시 30분 KBS역시 불타올랐다. 시위가 고조되어 감에 따라 흥분한 시위대들은 세무서까지 방화하기에 이른다. 21일 새벽 1시 15분쯤에 별관은 불타올랐고 본관 방화에는 실패하였는데, 이것마저 21일 오전 10시쯤에 전소했다. 도청주변과 광주역 앞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인 시위대와 선무 방송차를 따라 곳곳을 돌아다니는 시위대는 밤이 깊은 줄 몰랐다. 도청과 광주 역을 제외한 전 지역이 시민의 손에 장악되었고 21일 새벽 2시부터는 모든 시외전화가 두절되었다. 뿐만 아니라 광주로 향하는 고속버스와 열차도 운행이 중단되었다. 이러한 교통과 통신의 두절 상태는 27일 오전까지 계속되었다. 이때까지 광주에 관한 기사나 공식 발표가 일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언론에 대한 불만도 고조되어 갔다. 기사들이 기사를 써봤자 계엄사의 검열과정에서 모두 삭제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전남일보와 전남매일도 신문발행이 어렵게 되었다.
21일의 오전에도 역시 군중들은 상업은행 앞에서 도청을 바라보며 집결하고 있었다. 군중들의 선두대열에서는 공수부대군인들의 만행에 대한 규탄, 비상계엄령 철폐, 정부의 공식 사과, 군인들의 철수 등에 대한 열띤 토론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제 더 이상 사상자가 생기지 않도록 계엄군 측과 협상을 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에 전옥주, 전남대 대표 김상호, 조선대 대표 김범태가 구용태 시장과 함께 도청으로 들어가 요구사항 1. 유혈사태에 대해 1차적으로 장형태 도지사가 사과할 것.
http://www.518.org/
http://www.taekom.pe.kr/518diary.htm
「현장 기자가 쓴 10일간의 취재 수첩」김영택, 사계절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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