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대인관계의 부정적 경험과 상처를 극복하고 건강한 자아와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개인의 상대방에 대한 공감능력’이다. 공감은 타인의 감정과 심리상태, 경험을 마치 나의 것처럼 경험해보는 일종의 ‘정서적 공유’가 될 수도 있고, 상대방의 정서적 상태나 관점을 살펴보려는 ‘이해의 과정’이라고 볼 수 도 있다. 즉, 공감은 개인이 상대방의 생각이나 느낌을 공유, 이해하고 이해한 생각과 느낌을 수용적인 태도로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도록 반영해주는 능력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초등 도덕 교육이 현실적인 측면에서 조금 더 실질적인 의미를 갖고자 한다면 공감에 대한 교육이 구체적이고 세부적일 필요가 있기에 ‘공감’ 이론을 선택하였다.
Ⅱ. 공감 이론
1. 흄
영국의 철학자. 경제학, 역사에 대해서도 저술이 있다. 경험론 철학자 로크의 학설에 영향을 받아, 불가지론의 방향으로 진전시켰다. 그에 의하면 지식의 역할은 존재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을 인도하는 능력을 갖는 것이다. 여기서 이미 그가 회의론의 입장에 있으며 불가지론의 주장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 의하면 모든 인간에게 존재하는 것은 직접적인 감각적 경험인 인상의 흐름이며, 이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다고 한다. 자아라는 것도 이러한 인상의 묶음을 말할 뿐이다.
경험에서 얻어진 사물의 기본적 관계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인과관계)이지만 이것은 단지 관습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그 확신성은 이론적 지식의 입증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견해로부터 그의 도덕설은 유용성이 그 기준을 이룬다는 공리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신에 대한 신학이나 철학의 이론을 거부하며 종교를 역사적 경험에 호소하여 이해, 그 공과를 인정하고 있다. 이 불가지론의 철학은 현재에도 그 영향이 계속되어 실증주의로 나타난다.
2. 흄의 ‘공감’
흄은 이기주의 이론을 적용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이는 많은 예들을 든다. “우리는 자주 매우 오래 전에 먼 나라에서 행해진 덕이 있는 행위에 대해서도 찬사를 보내는데 아무리 최고로 예민한 상상력을 동원하더라도 우리에게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사건으로부터 그것이 우리의 자기 이익에 도움을 주는 현상이나 아니면 현재 우리의 행복과 안전에 연결되는 단 하나의 실마리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자주 우리의 적들의 용맹이나 고결함을 칭찬하는데(미국인들 사이에 나치 군대의 장군이었던 롬멜에 대한 칭찬이 널리 퍼져 있거나 우리가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영웅시하는 것과 같이) 이는 자기 이익의 측면에서는 거의 설명이 불가능하다. 만일 고대의 영웅이나 현재 우리의 적들이 지니고 있는 덕이 그 자체의 유용성 때문에 칭찬의 대상이 된다면 이 때의 유용성은 결코 우리 자신에게 유익한 유용성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이 때의 이익은 칭찬의 대상이 되는 특성이나 행위를 통해서 도움을 얻는 사람의 이익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덕이 있는 행위들이, 아무리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우리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왜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사람들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행위나 특성 또는 제도들에 대하여 도덕적 시인을 표시하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국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사실 인류 전체의 복지에 대하여 동정심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비록 자기애가 “폭넓게 힘을 발휘하는” 인간 본성의 원리라는 점이 분명하다 할지라도 사회 전체의 이익 또한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되며 이러한 폭넓은 사회적 이익에 기여하는 대상을 파악함으로써만 우리의 도덕적 시인을 설명할 수 있는 경우도 많이 있다. “따라서 만일 유용성이 도덕적 정서의 근원이라면 그리고 이 유용성이 항상 자기 자신과 관련해서만 고려되는 것이 아니라면 이로부터 사회 전체의 행복에 기여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로 곧바로 우리의 시인을 받으며 선한 의지가 그것을 추천한다는 사실이 도출된다.”
사실 흄은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행복 및 불행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사람의 슬픔과 애통함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쳐서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며 “다른 사람의 눈물과 비명과 신음 소리는 항상 우리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며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우리는 몸이 불편한 사람에게 동정심을 느껴 “그를 염려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거의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들과 정부의 운명에도 관심을 가진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운명에 대해서 무관심하다는 견해는 간단하게 경험적 사실들을 통해서 반박된다. “단단하게 포장된 길 위를 혼자 걸어가면서 일부러 다른 사람의 아픈 발가락을, 그 사람과 다투었다거나 하는 일이 전혀 없는데도, 계속 밟으려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자기 이익이 문제시되지 않는 경우에 우리는 정책이나 행위를 결정함에 있어 기꺼이 다른 사람들의 행복과 불행을 고려한다. 따라서 최소한 때때로라도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을 드러내며 그들의 복지에 관심을 보이는데 이는 이기주의자가 주장하는 냉담한 무관심과는 전혀 다른 감정이라 할 수 있다. 흄은 우리가 자주 자기 이익에 따라서 행위하며 질투나 복수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이런 동기들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그는 주장한다. 따라서 “모든 인류는 지금까지 선한 원리에 상당히 다가갔으므로 이익이나 질투, 복수심 등이 우리의 성향을 잘못된 길에 빠트리지 않는 경우에는 항상 인류애를 발휘하여 사회 전체의 행복을 선호하도록 인도되며 결국 이익이나 질투, 복수심에 반대되는 것을 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분명히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동정심은 그들과의 거리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따라서 우리는 시간, 공간적으로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보다는 우리와 가까운 가족 구성원들에 대하여 가장 절실한 동정심을 느끼며 그 다음에는 우리가 직접 참여하는 모임의 친구들에 대하여, 그 다음으로는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에 대하여 동정심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더욱 인간적이 되면 될수록 우리의 관심의 범위가 더욱 넓어지고 다른 사람들의 궁핍을 더욱 적극적으로 도우려 할 것이다. 이것은 경험이 주는 교훈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비록 자기애의 원리가 우리 안에서 강력하게 작용한다 할지라도 또한 자비심의 원리도 동시에 존재함을 알게 된다. 왜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는 행위와 관행들을 시인하는가를 설명해주는 것은 바로 그러한 행위와 관행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것에 동의하는 우리의 성향이다. 만일 우리가 사회 전체의 행복과 이익이라는 목적을 시인하지 않았다면 그 목적에 대한 수단들도 시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1. 로버트 L. 애링턴 지음, 김성호 옮김,《서양윤리학사》, 서광사, 2005.
2. 김태길 저, 《윤리학》, 박영사, 1997.
3. 네이버 인명 백과 사전
4. 초등3학년 교과서 및 지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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