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사로 본 한국사 생각하는 민족이 되어라
함석헌의 사상은 ‘비폭력 무저항주의’가 아니다. 그 말 자체조차 의미가 없는 말이다. 비폭력에 무저항이라니. 바로 ‘비폭력 저항주의’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내가 함석헌으로부터 이 말을 전했다고 한다면, 아마도 달게는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그 말이 맞다고 하여도, 결국은 비폭력 저항주의라고 하든 비폭력 무저항주의라고 하든 뭐든 다 상관없다고 할지도 모른다. 결국은 그 말보다 근원적인 자기 안의 세워진 ‘뜻’으로 이야기 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여하튼 나의 이해대로 풀어보면서 이렇게 비폭력 저항주의로 전개해본다면 과연 역사는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럴 순 없는 것이다. 마땅히 저항이 존재한다. 현실을 모두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생각하는 민족에서 역방향으로 길을 걷는 것과 같다. 불의를 안고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실 고난을 겪는다. 병자호란, 임진왜란 같은 이런 고난의 경우, 이 민족이 안게 된 고난이지만 이것을 통해 민족이 새롭게 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러한 일들이 발생하기 이전에 그러한 역사적 조심을 발견하고 더욱 민족 안에 생명의 싹이 무성하게 자라날 수 있었던 기회들을 모두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깨어있지 못했기 때문이며, 생각하는 민족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뜻을 두지 않고 자신들의 사리사욕과 안위를 먼저 생각하고 시대적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으며 그 문제가 거론되어도 당파싸움 안에서 누가 누구의 편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에 대한 한심한 모습에서 임경업, 김덕령과 같은 깨어있는 사람이 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생을 떠나야 하지 않았던가.
시대의 예언자같이 하나님이 그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 일했던 사람들이 흔하게 시대 속에서 보이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기에, 그러나 그 사람들이 맥없이 소멸되어지는 것을 볼 때 함석헌의 마음도 그 글을 써나가며 얼마나 답답해했을지 문득 생각을 해본다. 정말 답답한 것은 그러한 인물에 대한 죽음이 아니다. 물론 아깝지만 그 죽음은 정신이 되어 민족의 채찍이 된다. 그렇지만 답답한 것은 그 사람들을 통해서 보다 뜻을 세울 수 있는 생명의 꽃을 민족의 땅에서 일으킬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린 그런 아쉬움이 사무치는 것이라고 본다. 종교의 힘은 어떠했는가? 종교에 대하여 함석헌은 ‘민중을 건지는 힘’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유교와 불교, 기독교는 무엇을 하였는가? 의례와 형식, 그리고 함석헌은 종교적 생명력을 잃어버린 모습을 보았다. 천주교도 이 민족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였는데 기독교는 그것을 보완하듯 오다가도 결국 해결하지 못한 채 남아있다.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종교도 민족 앞에서 무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조차 그 본래적 장점을 살리지 못하고 민중을 건지는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역시 그렇기 때문에 민족의 여전한 고난이 현존하는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다.
이러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민족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를 가진다. 그런데 이 고난은 결국 두 가지 차원으로 내게 이해가 되고 있다. 첫째는, 주어진 기회에서 생각하는 민족이 되지 못한 필연적 결과로서의 고난. 둘째는, 역사 가운데 뜻으로 다가온 고난이다. 뭘 해도 고난이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연단과 성장, 그리고 시험이라는 섭리가 함께 내포되어있다고 판단된다. 고난은 고통스러운데 그것이 왜 필요한가. 그 이유는 그 이상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은 그보다 값지고 달다고 말할만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결국은 씨알인 민중의 정신을 점차적으로 깨워주고 있다는 역사 안에서 낙관론을 펼치고 있으며 그것은 고난에 의한 것에서 가능했다는 것이다. 굳이 이 부분에서 신정론에 대한 부분을 말할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 느낌으로는 어느 정도 이레니우스의 신정론과 맞닿아 있는 듯 보인다.
함석헌이 이 고난 속에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다른 측면에서 알아보자. 우리 민족의 역사의 주체가 누구인가. 지금껏 달려온 민족의 역사는 제대로 나라가 지도자에 의해 바로 이끌어졌더라면 이후의 수많은 고난들이 없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적은 없었다. 많은 시도들이 있었고 그 시도들에서는 이 땅에 찾아온 빛과 같이 하나님의 자기 의지를 드러내듯 혜성과 같은 씨알들이 있었지만 결국 활짝 피지 못하였던 것이다. 결국 이 민족은 아비 잃은 자식과 다름이 없다. 다른 말로 지금껏 지도자 없던 백성이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함석헌이 ‘우리는 나라없는 백성이다’라고 이야기 했던 말이 새삼 이해되기도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민족의 주체는 늘 씨알이었다는 것이다. 백성이 곧 씨알이며 오랜 역사 속에서 민중은 고난 속에 견디고 견뎌왔다. 그러나 해방 즉 후 어떠했는가. 정치적 야욕을 가진 자들의 모습을 보며 답답해하는 모습을 글을 통해 본 것 같다. 이에 대한 두 가지 비판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그동안 임금과 지도자 없었던 백성으로서 이 나라의 근본이며 주인은 씨알이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젠 새로운 시대에서 새로운 인물과 지도자로 하여금 새로운 나라를 다시 세워야하는데 기존 기성의 체제로 다시 회귀함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었다는 점이다. 새로운 정신으로 세워져야 하는 함석헌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동안은 민족이 주체가 되어 풀어나갔고 그 의지에 따라 고난이 연결선상에 있었는데 6.25 전쟁부터는 다른 역사적 뜻으로 이해했다. 바로 이것은 우리들의 뜻과는 상관없는 고난이었다는 것이다. 형제가 싸울만한 이유가 있던가. 이념의 싸움? 그 전에 우리는 한 형제라는 사실을 서로 깊이 대화하고 끌어안았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6.25 전쟁은 신들의 싸움’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예측하지 못했고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며 우리 민족 주체로부터 발생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엄연히 말한다면 여기에서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의 개념으로서 신들이 아니다. 바로 우리 생각의 대립과 갈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후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의 과정에서 생긴 ‘38선’에 대하여 함석헌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한다. 함석헌에 따르면, 38선은 하나님의 시험이라고 말한다. 그 내용은 다름아닌, ‘지금까지 많은 고난을 통해 깨달았다면 이제 너희들이 지금 해야할 것이 무엇이냐’라는 시험인 것이다.
여기에서 함석헌의 비폭력 저항정신이 나타난다. 여기에는 엄연히 말해 비폭적적 측면을 말해야 하겠다. 남북의 갈라진 것은 무엇인가? 이념이 진정 원인인가? 미국과 소련으로 인해서인가? 다 맞지만 다 틀리기도 하다. 뜻으로 본 역사에서 38선의 의미는 그렇기 때문에 다시 만나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신들의 전쟁 속에서 이념과 이념의 대립 이전에 우리가 한 민족인 것을 먼저 이야기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건 우리의 정체성을 여기에서 이야기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한’의 민족이다. 이 한의 의미는 함석헌에게 있어 중도의 의미를 가진다. 과거도 아니고 현재도 아닌 모두이며 전쟁은 어떠한가? 전쟁은 이기는 것이 이기는게 아니다. 서로 져야 비로소 서로 이기는 것이다. 이 책의 가장 마지막 구절이 생각난다. “칼을 꺾고 생각을 깊이하자”
승리는 무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역시 남과 북의 싸움은 무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생각을 깊이 한다는 것은 뜻을 보며 사는 사람들 씨알의 정신을 구현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적어도 우리가 깊이 생각하여 과거의 역사 속에서 그 뜻을 헤아린다면 오늘 우리는 중도의 의미를 가지고 ‘한’의 정신으로 남과 북의 관계를 바라봐야 한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문득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핵심이 떠오른다. 중도의 철학. 우리가 용기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과해도 덜해도 안되는 것이다. 그것이 덜하면 비겁이요, 과하면 만용이니 중도야 말로 온전한 것이며 시대를 통해 뜻으로 배운 우리 민족의 귀한 정신이다. 생각하는 민족이라야 산다. 세계는 이제 평화의 협정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으며 새로운 정신을 표출하고 있다. 우리도 해방 후 우리의 새로운 정신이라는 것은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모든 면에서 요청되어졌다. 동시에 이 민족은 지난 4년천간 얼마나 많은 시련과 고난을 안고 살아왔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짊어지는 것이 우리 민족이며 끌어안음에 익숙한 민족들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계적 사명을 가진 나라라고 이야기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긴 역사는 위대함보다는 져왔던 짐을 가지고 온 그런 민족이기 때문이다. 불의를 안는 자기 있기 때문에 세계를 건진다는 말은 얼마나 의미있는 말이던가? 정말 바울과 같고 또 성서적이지 않는가? 이 나라가 고난을 말하여도 자기 희생과 비움의 사상의 흐름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경이롭고 놀라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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