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주화운동에 대하여
전남대 학생들을 주축으로 시위가 이뤄지면서 19일 오전부터 시위대의 중심세력이 학생에서 일반 시민대중으로 옮겨졌다. 공수부대의 진압에 산발적인 저항을 하던 시민들은 이날 오후부터 적극적인 공세로 전환, 계엄군과 시민간에 유혈충돌이 벌어졌다.
‘5·18의 꽃’ 전옥주씨가 광주에서 처음 가두 방송을 시작한 것은 19일 밤에서 다음날로 넘어가는 새벽. 전씨는 계엄군의 잔혹한 진압 상황을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처음에는 도청까지 걸어가면서 방송을 했고, 이어 소형 트럭에 옮겨 타고 다녔다.
「광주시민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편안하게 집에서 잠을 잘 수가 있습니까? 우리 동생 형제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20일 오전 광주일고 앞에서 가슴이 드러난 채 대검에 찔려 피투성이가 된 여학생의 시체를 발견하고 그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렸다. 이 말은 시민들 사이에서 급속도로 퍼져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전씨가 탄 방송차 뒤에는 늘 시위대들이 따라다녔다.
계엄군으로 투입된 한 공수부대 하사관은 자신의 수기 「내가 보낸 화려한 휴가」에서 당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전씨를 사살하라는 특명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계엄군이 물러난 22일, 전씨가 오전 방송을 하고 잠시 쉬는 사이 갑자기 군중속에서 “저 여자 간첩이다”라면서 신체 건장한 40대 남자 몇 명이 전씨를 끌고 갔다. 계엄군에서 다시 31사단 보안대에 끌려간 전씨는 30일 가량 불법구금돼 가혹한 구타와 물고문을 받았다.
‘이북 모란봉에서 2년간 교육받고 남파된 간첩’으로 몰린 전씨는 9월19일 계엄포고령 위반과 내란음모 등의 죄목으로 15년형을 선고받고 10월27일 광주교도소에 수감됐다. 이때 전씨는 쇠파이프로 맞아 척추뼈 두 개가 가라앉고 손 발이 뒤틀리는 고문을 당했다.
전씨는 81년 4월3일 대통령 특사로 풀려났다. 그러나 전씨가 취직하는 곳마다 안기부 요원이 쫓아다니며 방해를 해 번번이 직장에서 쫓겨나야 했다. 그후 전씨는 강제징집당했던 이모씨를 만나 김상현 의원의 주례로 전통혼례를 치뤘다.
하지만 세 아이를 키우며 난생처음 ‘행복’이란 단어를 떠올릴 즈음 전씨에게 걷잡을 수 없는 불행이 닥쳐왔다. 권력과 이권에 눈먼 5·18 동지의 ‘배신’ 때문이었다.
서울 성동구에 살 무렵 전씨는 지금은 영부인이 된 이희호여사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91년 제1기 지자체 선거가 있을 무렵 영부인은 전씨에게 성동구 시의원 출마를 권유했다. 그러나 전씨는 ‘5·18의 전옥주’로 남기 위해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같은해 전씨를 다시 광주로 내려가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91년 4월 서울 명지대생 강경대군이 학원자주화를 위한 결의대회를 갖고 경찰과 대치하던 중 교내에 난입한 백골단이 휘두르는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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