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7년 대학교육에 실망을 느껴 카잔대학을 중퇴하고 향리로 돌아가 지주로서 영지 내의 농민생활을 개선하려 하였으나, 그의 이상주의는 실패로 끝나고 잠시 방탕생활에 빠졌다. 1851년 형의 권유로 군대에 들어가 카프카스에서 사관후보생으로 복무하고, 다음해 처녀작 《유년시대 Detstvo》(1852)를 익명으로 발표하여 네크라소프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소년시대 Otrochestvo》(1854) 《세바스토폴 이야기 Sevastopoliskie Rasskazy》(1854∼1856) 등은 군에 복무하면서 집필한 작품들로서 1855년 군에서 제대하고 수도로 올라갈 무렵에는 이미 청년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62년 궁정 시의(侍醫)의 딸인 소피아와 결혼하고 문학에 전념하여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침입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 사회를 그린 불후의 명작 《전쟁과 평화 Voina i mir》(1864∼1869)를 발표, 이어 《안나 카레니나 Anna Karenina》(1873∼1876)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 무렵부터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무상(無常)에 대해 심한 정신적 동요를 일으켜, 과학 ·철학 ·예술 등에서 그 해답을 구하려 하였으나 얻지 못하고 마침내 종교에 의탁하였다. 이때가 그의 전향기로서 《교의신학비판(敎義神學批判)》(1880) 《요약 복음서》(1881) 《참회록 Ispoved’》(1882) 《교회와 국가》(1882) 《나의 신앙 V chem moya vera?》(1884) 등을 통하여 그의 사상이 체계화되어 갔다. 이 전향 후의 사상을 보통 ‘톨스토이주의’라고 한다.
그는 러시아 정교회에 속하지 않는 성령부정파교도(聖靈否定派敎徒)와 친교가 있어 4,000명에 달하는 이 교도들을 미국에 이주시키기 위한 자금을 조달할 목적으로 장편소설을 발표하였는데, 그것이 유명한 《부활 Voskresenie》(1899)이다.
《부활》 이후의 주요작품으로는 《신부(神父) 세르게이》(1898), 희곡 《산송장》(1900), 단편 《무도회의 뒤》 《병 속의 아료샤》(1905)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종교와 도덕〉(1894) 〈톨스토이즘에 대하여〉(1898) 〈현대의 노예제도〉 〈자기완성의 의의〉(1900) 〈유일한 수단〉(1901) 〈세 가지 의문〉(1903) 〈셰익스피어론(論)〉(1903) 〈유년시대의 추억〉(1904) 〈러시아 혁명의 의의〉(1906) 〈마을의 노래〉(1909), 그리고 최후의 대작 《인생의 길》(1910) 등을 들 수 있다.
1910년 10월 29일 이른 아침 장녀와 주치의를 데리고 집을 떠나 방랑의 여행길에 올랐으나 도중에서 병을 얻어 아스타포보(현 톨스토이역)의 역장 관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 작품에서 톨스토이는 러시아의 농노 해방(1861년) 이후 빚어진 새로운 사회상황, 즉 결혼과 가족의 문제를 포함한 당대의 여러 사회적 문제와 풍속을 무려 150여 명의 인물을 등장시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사상적으로는 이보다 앞서 쓴 《전쟁과 평화》(1868∼1869)에서 볼 수 있는 생에 대한 예찬은 사라지고, 대신 레빈의 형의 임종 장면 등에서 생의 허무감, 죽음에 대한 공포감이 희미하게나마 나타나 있다.
-줄거리-
고관 카레닌의 정숙한 아내로서 안나는 페테르부르크의 호화저택에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계속해 가지만 너무나도 관료적이고 이성적인 남편에게 염증을 느낀다. 그녀는 마침내 미모의 청년 장교 우론스키 백작과 불륜의 사랑에 빠지고 이윽고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만다. 그리고 사교계에서도 따돌림을 받아 애인과 더불어 외국으로 떠나버리는데, 이윽고 우론스키의 애정이 식어 가는 것을 깨닫게 되자 질투와 광기를 누르지 못하고 철도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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