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아독존의 성격
김동인은 자신의 소년기를 회상하면서 유아독존적인 생활을 했다고 말한 바 있다. 삼남 일녀 가운데 차남이었지만, 둘째 부인의 첫아들로 태어났기에 그는 집안의 귀공자로 자라났다. 소년기의 이런 유아독존의 생활은 이후에 그로 하여금 오만하고 독선적이라는 평을 듣게 했고, 그가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로 빠져드는 데도 한몫을 했다. 다음은 그의 회고담 가운데 한 대목이다.
"나는 그때 소년다운 야심이 만만하던 시절이다. 더욱이 나의 아버지가 나를 기르실 적에 유아독존의 사상을 나의 어린 머리에 깊이 처박았으니, 일본문학 따위도 미리부터 깔보고 들었으며, 빅토르 위고까지도 통속 작가라 경멸하리만치 유아독존의 시절이었다. 따라서 일본 아이들과 문학담을 하면서도 너희 섬나라 인종에게 무슨 큰 문학이냐 하는 생각을 늘 속에 품고 있었다." (김동인, 「문학과 나」에서)
- 톨스토이와 인형조종술
그는 1912년 평양 숭덕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어 기독교 학교인 숭실중학교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듬해 중퇴를 하고, 열네 살 되던 1914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학원 중학부에 입학했다. 그가 일본 유학을 가게 된 것은 중학교를 중퇴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급우였던 주요한이 먼저 동경으로 유학을 떠나자 이에 자극받은 탓이 컸다. 김동인은 동경학원 폐쇄로 메이지 학원에 편입하였다. 1918년에는 가와바타 미술학교에 입학했으나 이곳도 오래 다니지 못하고 중퇴를 한다.
이러한 유학 생활 중에 그는 주요한에게서 자극을 받아, 의사나 변호사가 되려 했던 당초 목표를 바꾸어 문학에 뜻을 두게 되었다. 이렇게 문학에 입문한 김동인은 우연히 마주친 톨스토이의 작품에 매혹 당하게 된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내가 톨스토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안 것은 열서너 살 때이다. 그때 나의 장형 동원이 모 사건에 걸려서 윤치호 씨 등과 영어의 몸이 되었을 때 톨스토이의 이라는 책자를 차입하여 달라는 편지 때문에 그 책을 구하러 다니느라고 톨스토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김동인은 큰형을 통해 톨스토이란 이름을 처음으로 접한다. 그리하여 이후 톨스토이는 그의 문학의 중심이 되어버린다. 톨스토이를 경모해 마지않던 김동인은 톨스토이의 소설로부터 나름의 독특한 문학관을 이끌어내기까지 한다. 톨스토이에서 영감을 받은 김동인의 창작 방법은 흔히 “인형조종술“이라 일컬어진다. ‘인생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인형 놀리듯 하는 놀음‘으로서의 문학이 바로 김동인 문학의 핵심이었다.
- 문학에의 길
1919년 김동인은 동경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문예동인지인 『창조』를 자비로 출판하여, 창간호에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고, 3호에서 6호에 걸쳐서는 「마음이 옅은 자여」를 발표하였다. 31운동의 파문으로 귀국한 뒤, 아우의 부탁을 받아 격문을 기초하여 주었다가, 출판법 위반으로 투옥되어 6개월의 징역을 살았다.
김동인은 1921년 경영난 때문에 『창조』를 제9호를 끝으로 폐간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주색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한다. 그러다가 1923년 창작집 『목숨』을 자비로 출판하고, 1924년에는 『창조』의 후신격인 동인지 『영대』를 간행하였으나, 다음해에 제5호를 끝으로 역시 폐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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