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은 사건 다른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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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5월 18일을 전후하여 20돌 맞은 5.18 광주민주화 운동 기념 행사가 광주를 중심으로 서울 등지에서 열렸다. 80년 당시 폭동으로 간주되었던 5.18은 20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면서 그 민주화 정신을 되새기고자 하는 의식과 함께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으로 국가기념일로 인정받고 있다. 이처럼 5.18 민주화운동과 같이 세월이 흐르면서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는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알아 보고자 한다.
◈ 4.19 의거에서 4.19 혁명으로
우리 나라 역사상 민중이 정권을 타도하는데 최초로 성공한 것이 바로 1960년에 일어난 4.19 혁명이다. 이 4.19 혁명은 3.15 부정선거로부터 발화되었다. 장면 박사가 유세를 하기로 되어 있는 2월 28일, 이날은 일요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에게 등교령이 내려졌다. 이는 민주당의 선거 연설을 듣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분노한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살리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하였다. 특히 4월 18일 고려대생 3천 여명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데모를 한 후 귀교 길에 정치깡패의 습격을 받아 수십 명이 부상하는 사태발생은 4.19 혁명의 기폭제가 되었으며, 이날의 고대생 시위는 부정선거에서 독재타도로 구호를 바꾸어 놓았다. 뿐만 아니라 이튿날인 4월 19일 대학생들의 총궐기의 계기가 되었다.
피의 화요일로 불린 4월 19일 고교대학생을 비롯, 10만 여명의 서울시민이 시위에 참가했으며, 시위대의 일부가 정부기관지 서울신문사와 반공회관경찰서 등에 불을 지르고 부정선거를 규탄했다. 이날 경찰은 무차별 발포를 했으며, 이로 인해 서울에서만 104명, 부산에서 19명, 광주에서 8명 등 전국적으로 186명이 사망하고 6,026명이 부상당했다.
정부는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를 하기 시작한 직후 서울 등 주요도시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하지만 군대는 유혈사태를 방지하고 파괴방지에 전념할 뿐, 중립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내각이 4월 21일 유혈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22일 이기붕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당시 부통령이던 장면도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것을 촉구하며 부통령직을 사퇴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는 등 일련의 조치를 통해 사태를 수습하고 정권을 유지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미 혁명적인 열기에 휩싸인 민중은 이승만 하야를 요구하였고, 급기야 26일 오후 2시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시민 대표와의 면담에서 하야 의사를 밝힌 것이다. 이로써 이승만 정권은 타도되었다. 이 4.19 혁명 과정을 통해 민중들은 자신들이 주체라는 점을 뚜렷이 인식하고 행동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행동을 제약하던 요소들을 극복하여 앞으로의 과정에서는 주체로서만이 아닌 운동의 직접적 담당층으로까지 역할을 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 4.19 혁명은 군부독재권력 이후 한때 사회 혼란, 민주주의에 대한 그릇된 이해라 매도되어 4.19 의거라고 이름하기도 했다. 이는 애써 그 의미를 축소하려는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그 정신은 역사 속에서 계속 이어졌으며, 현재에는 4.19 혁명 기념일로 그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처음 4월 혁명, 4.19학생혁명, 또는 4.19 민주혁명으로 불리던 4.19가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의거로 격하되었다가 다시 문민정부에 와서 4.19혁명으로 전환되는 것은 시대에 따라 역사의 평가가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 10.26 사태? 거사?
경기도 광주 삼성공원묘지의 김재규 묘소에서 가끔씩 사건이라기 보다는 웃지 못할 헤프닝이 일어나고 있다. 김재규 묘소 옆에 세워진 묘비를 누군가 넘어뜨리고 나면 다시 누군가가 제자리에 세워놓기를 거듭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대통령 시해범으로 처형된 김재규의 평가가 엇갈리고 있음을 암시한다. 김재규와 그와 함께 처형된 유족은 말할것도 없고, 카톨릭과 법조계를 비롯한 사회 일각에서는 꾸준히 김재규의 재평가와 명예회복을 요구하고 있다.
김재규는 광주양민학살이 절정에 이르고 있을 때인 1980년 5월 24일 내란죄 등의 혐으로 처형되었다. 김재규를 내란죄 혐의로 처형했던 사람들이 16년 후에는 자신들이 군사반란 및 내란 수괴라는 혐의로 재판정에 섰다. 이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좀더 극단적인 비교이지만 일각에서는 이런 이야기들을 하기도 한다.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안중근은 실정법에 의해 살인범으로 처형되었지만, 역사는 그에게 의사의 칭호를 붙이고 재평가와 명예회복과 복권을 주저하지 않는다고. 그리고 전봉준 역시도 반란수괴의 이름으로 처형되었다가 혁명가로 복권되어 남북한에서 함께 존경받는 농민혁명가로 평가되고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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